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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즈 Nov 07. 2023

불혹

7부


*

며칠 후 이나가 캐나다에서 귀국했다. 이나와 난 여전히 공식적으로 과씨씨였다. 이나와의 연애는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종종 내 마음이 어지럽혀졌다.


동아리 모임 때문에 늦는다는 문자를 받은 날이었다. 새벽 한 시가 돼도 연락이 없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몇 번 더 전화를 걸다 창자가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타들어가는 느낌, 고통, 그때 아침에 이나가 나와 사귀고 난 후 잘 입지 않았던 가슴골이 깊이 파인 빨간색 니트를 입은 장면이 떠올랐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며칠 전 동아리 선배 오빠에게 인사해야 한다며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던 뒷모습이 그려졌다.


‘그 새끼랑 같이 있는 거야. 나에게 말했던 것처럼 오늘 밤을 같이 보내자고 했을 거야. 여자 친구가 있다는 그 선배 말엔 자신도 남자 친구가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을 거야......’


머릿속 말소리가 멈추지 않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미 쏘아 올린 로켓처럼 엄청난 속도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 냈다. 머리에서 ‘띵!’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다시 이나의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뚜뚜뚜.”


그리고 찾아온 참을 수 없는 분노. 내 몸이 멋대로 주방으로 달려갔다. 부지불식간에 수저통 옆에 놓인 식칼을 집었다. 신문지로 식칼을 돌돌 말아 바지 뒤춤에 끼우고 웃옷으로 덮었다. 모자를 쓰고, 점퍼를 입고 밖으로 뛰쳐나와 택시를 잡았다. 이나의 자취방 앞에 도착했다. 뒤춤에서 신문지에 감싼 칼을 오른손으로 들었다. 달빛이 유난히 밝았기 때문이었을까. 언덕길 위에 손에 칼을 든 검은 그림자가 눈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때 마침 길 옆에 화단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화단에 신문지에 감싼 칼을 버리고, 다시 택시를 잡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 내 두 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

군대를 전역하고 3학년으로 복학신청을 하기 위해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미래를 우연히 만났다. 미래는 인생을 다 깨달은 사람처럼 근엄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나우야. 사랑은 없어.”


끊임없이 남자가 바뀌었던 미래의 이 말에 난 그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저녁에 너 아르바이트하는 호프집 놀러 갈게. 나중에 봐.”


복학 신청을 마치고, 이제는 3학년이 된 후배들을 만났다. 자판기 커피를 뽑아 경영대 운동장을 바라보며 서서 담배를 나눠 폈다.


그중 한 녀석이 “형. 이나 누나 공무원 시험 준비한대요. 졸업하고 바로 노량진으로 갔다고 들었어요.”라고 이나의 근황을 전했다.


난 대답 없이 담배연기를 내뿜을 뿐이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4학년이 됐다. 3학년 동안 몇 번의 짧은 연애를 했다. 누군가에게 온전하게 마음을 주기도 받기도 힘에 겨웠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미래와 약속한 열 번의 경험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4학년 겨울 친하게 지내던 편입생 형과 소주를 마셨다. 둘이 네 병 정도 마신 것은 기억하는데 그다음 기억이 없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이나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진우 오빠가 알려줬어. 오빠 많이 다쳤다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빙판길에서 넘어졌다고. 운전한 사람은 헬멧을 써서 괜찮은데 뒤에 탄 오빠가…”


나는 다행스럽게도 다리가 부러지고, 코와 눈을 다치긴 했지만, 머리를 심하게 다치지는 않아서 의식은 멀쩡했다. 이나는 공무원 시험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매일매일 병원으로 와서 내 병간호를 했다.


“오빠랑 헤어지고 너무 힘들었어. 너무너무. 오빠를 위해 매일 기도했어.”라는 이나의 말을 듣고 가슴이 녹아내렸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했다는 그 마음에. 이나는 그간의 이야기를 내게 말했다. 자신이 달라졌다고. 예전처럼 남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오빠랑 헤어지고 다른 남자를 만난 적 없다고. 오빠만 있으면 된다고. 사랑한다고. 다시 함께하자고.


난 그녀의 모든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퇴원 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를 통해 이나의 소식을 들었다. 그 해 공무원시험에 떨어졌다고. 이나는 다시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노량진으로 들어갔다고.


【8부】에 계속


*이 글은 픽션입니다.  등장인물과 사건 등은 실제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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