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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즈 Nov 28. 2023

불혹

8부

*  

“빗방울이 눈꽃송이처럼 내리네.” 미래가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비친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한다. 미래의 한마디 말에 호프집이라는 공간과 주변의 소음이 정지된다. 빗방울이 눈꽃송이처럼 내린다는 그 말을 뱉는 미래의 입술의 미세한 움직임과 살짝 접히는 눈가의 실주름에 마음이 동요된다. ‘넌 참 신비로운 사람이야.’ 속으로 오물거리지만 말로 뱉지는 않는다. “주방 마감시간입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지금 주문해 주시겠어요?” 정적을 깨고 다가온 현실에게 “알겠습니다. 저희도 곧 일어날 겁니다.”라고 답한다. “미래야. 이제 일어나자.”


*

서른다섯. 미래의 카톡 프샤가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으로 바뀌었다. 미래는 공무원이 됐고, 몇 년 후 해외연수로 중국 상하이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혼을 했다. 듣기로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현지 권력자의 자제라고 했다. 난 타국에서 열린 미래의 결혼식에 가지도 않았지만, 축의금도 보내지 않았다. ‘미래 넌 참 대단하다. 결국 한국이 아니라 해외에서 잘 사는구나.’ 속으로 한 마디 뱉을 뿐이었다. 미래가 결혼한 그 해 나 역시 열 번째 연애상대였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결혼 반년만에 아내는 임신했다. 다음 해에 아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을 낳았다. 그렇게 미래와 내 인연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오래전 꿈속 운동장 트랙 세 바퀴 반의 의미가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마지막 반 바퀴 트랙을 돌고 미래의 손은 왜 잡은 것인지는 아리송한 의문으로 남게 됐다.


*

코로나로 중국 파트 팀장이 출장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 상하이에 머물렀다. 코로나 2년 차에 그는 회사를 사직하고 중국에 자신의 회사를 차렸다. 그로 인해 회사가 새로운 인력도 증원하기 어려웠던 터라 유럽 담당인 내가 중국 파트도 담당하게 됐다. 코로나 시기였기에 화상미팅만 줄곳 진행했었다. 중국 회사 담당자가 영국에서 유학한 유학파 출신으로 영어를 잘했기에 의사소통도 문제가 없었다. 중국 파트를 담당하면서 마음 한편에 미래와 어쩌면 우연히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출장은 없었고, 코로나가 끝나면 더 이상 중국 파트까지 담당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예측했다. 그런데 갑자기 코로나가 끝났다. 나는 아직도 중국파트도 담당해야 했고, 마지막일 수도 있는 상하이 출장도 잡혔다. 상하이 출장과 미래는 사실 별개였지만 마음이 콩닥댔다. 그렇다고 미래에게 따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상하이 푸동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까지 마중 나온 중국인 담당자 첸과 함께 업무일정을 소화했다. 출장 이틀 차에 쑤저우 근처에 있는 배터리공장 실사 견학을 마치기가 무섭게 첸이 말했다. 저녁에 상하이 시내로 돌아가면 자신이 잘 아는 한식당에서 접대를 하겠다고. 한국 사람은 하루라도 김치를 먹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첸을 따라 한식당으로 가는 길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미래였다. 잠시 서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그리고 첸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미래에게 연락했다. 우리 만날까. 미래는 남편과 별거 중이라는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뱉으며 주소를 보낼 테니 택시기사에게 보여주면 된다고 했다. 택시가 도착한 곳은 일본어로 비루라고 간판이 쓰인 호프집이었다. 재밌는 건 조선족 교포 사장님이 운영한다는 점이었다. 메뉴판에 황태포라고 한글로 적혀있었다. 난 반가운 마음에 “500cc 생맥 두 잔과 황태포 주세요.”라고 말했다.


【9부】에 계속


*이 글은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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