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주 오래 된 이야기
"그래서, 너는 어떤 사람인데?" 라는 질문에 말문이 턱 막히는 때가 있었어요. 내가 나를 미처 지탱해내지 못하고 여기저기 아슬아슬하게 기대며 지내는 순간이 켜켜이 쌓이던 때였죠. 그 질문이 그나마 한 구석에 기대에 있던 어깨를 발로 툭 쳐 넘어뜨리는 것 같았어요.
내 색이 분명치 않아 두려웠습니다. 어디를 가도 유달리 눈에 띄는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그 속에서 나만 무기가 없는 것 같아 두려워하지 않는 척, 부러워하지 않는 척하기에 급급했어요. 똑같은 100점이라도 90점과 10점을 받는 게 40점과 60점을 받는 것보다 좋다고들 하기에, 뚜렷하고 선명하고 채도가 높아야 사랑받을 수 있다 믿었기에, 내 색이 흐린 걸 숨기고 싶었어요. 이 색 저 색 얹어보다가, 표정과 어우러지지 않아 하나씩 내려놓을 때 연거푸 상실감을 느끼는 것도 지겨웠어요.
그렇게나 애타게 찾다가 결국 그냥 옅은 색이 내 색이라는 걸 인정해보린 날,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어요. 흐리고 미지근한 색이 모이고 모여 결국은 단단하고 진해지는 요즈음이 반가운 동시에 낯설기도 해요. 다만, 이제 더 이상 답답해하거나 속상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분명하죠. 내가 미지근하기에 뜨슨 물과 찬 물 가리지 않을 수 있고, 흐리기에 다른 색들을 더 분명히 알아볼 수 있어요. 한 층 한 층 켜켜이 쌓아내니 잔잔한 맛이 우러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도, 여전히 불안해요. 유별난 구석이 없으니 남들이 보지 않을 때 혼자 부단히 노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그렇더군요. 그래서, 가만히 있는 시간이 괜히 두렵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생기기도 했어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낄 때 나한테만 모든 게 쉽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그래요. 모든 층에 정성을 쌓아야만 무언가가 만들어질 때, 그러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나를 볼 때, 나에게 미안하기도 하답니다.
틀을 좋아하는 줄 알았고, 틀이 없으면 불안한 게 나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분명한 테두리를 마주하다보니 결국 나는 애초에 틀이 있으면 답답해하고 테두리가 별로 진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테두리가 진하지 않으니까 더 얕게 많이 모을 수 있는 게 그냥 나에요.
"그래서, 너는 어떤 사람인데?" 다시 물어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