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시작된 고민, 50대에 마침내 찾은 평화의 기록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채로 공기업에 입사하며, 나는 가족의 품을 떠나 두렵기만 한 독립을 시작했다. 시골에서 자라며 '착해야 한다', '인사를 잘해야 한다', '사람들과는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공동체 생활에서 필요한 가르침은 받았지만,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배우지 못했다. 기숙사 생활에서 마주한 여러 얼굴들, 특히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며 많은 심리적 괴로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고, 자연스럽게 칼 융의 '페르소나' 개념을 파고들게 되었다.
융에 따르면 페르소나는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맞추기 위해 쓰는 일종의 가면이자, 타협의 산물이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나는, 실제 모습과 달리 겉으로 '척'하는 행위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 같아 떳떳하지 못하게 생각되었다. 사람을 대할 때마다 다른 얼굴을 하는 것이 마치 연극배우가 된 듯 엄청난 피로를 안겨주었고, 심지어 내가 다중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런 심리적 괴로움 끝에, 나는 차라리 단순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관계가 힘든 것이라면, 꾸며낸 나로 힘든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힘든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담백하게, 본래의 나를 세상에 내보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상과 달랐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듯한 사회에서, 나의 담백함은 종종 '무시'라는 냉혹한 대가를 치렀다. 강한 면모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경험이 반복되자,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 가면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40대가 될 때까지, 가면은 나에게 세상을 향한 방패가 되었다.
오랜 경험 끝에 나는 중요한 진실 하나를 깨달았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며, 오직 자신의 눈높이로만 세상을 보고 판단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깨달음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한의사로서 환자들을 치료할 때, 충분한 신뢰(라포)를 쌓고 깊게 대화해보면 겉보기에 아무리 드세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 안에 다른 모습이 있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험적 확신을 바탕으로, 나는 사람에 대한 깊은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내가 보았던 수많은 '강함' 뒤에는, 대부분의 사람 역시 자신의 약한 면을 들키기 싫어 가면을 쓴다는 것을. 심리에 관한 연구를 거듭할수록 그 단단한 가면 속에 감춰진 여린 속내를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강한 척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속거나 위축되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이 심리적인 약함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방어기제임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인의 내면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깊어지자,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가면이란 인위적인 위선이 아니라, 각자의 눈높이에 맞춰 소통하기 위한 '눈높이 얼굴'이라는 것을.
이 깨달음 덕분에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내 중심을 지키게 되니, 마침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요즘도 소통 중 이해되지 않는 심리가 나타나면, 책과 유튜브, 그리고 AI와의 대화를 통해 곧바로 해답을 찾는다. 덕분에 내 마음의 평화는 굳건히 유지되고 있다.
이 평화가 참 좋다. 이는 세상의 잣대가 아닌,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타인의 가면마저 이해하게 된 후에야 얻게 된, 진정한 내면의 평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