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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래 Jul 22. 2021

불가항력의 불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주제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잘 주조된 두 캐릭터로부터 출발한다. 마리안느는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고용된 여성 화가다. 그녀가 그릴 대상은 언니로부터 ‘운명을 떠넘겨받아’ 강제된 결혼을 해야 하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다. ‘시선은 권력이다’라는 푸코의 말과 같이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사이에는 권력관계가 작동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는 전통적으로 남성적 매체였다. 카메라로 대변되는 남성 주체의 시선과 그 앞에 놓인 여성 객체라는 구도는 영화에 앞서 미술에서 남성 예술가와 여성 뮤즈의 관계로 표현되곤 했다. 그러나 셀린 시아마는 이 전통적인 구도의 양쪽 항에 모두 여성을 위치시킴으로써 전복의 단초를 마련한다.


그리고 이 구도는 엘로이즈가 모델이 되는 것을 거부하기에 몰래 그녀를 지켜보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마리안느의 상황으로 더욱 복잡해진다. 마리안느는 화가의 입장에서 모델인 엘로이즈에게 ‘지시’를 내릴 수 없다. 대신 산책 친구라는 가짜 신분으로 엘로이즈 곁에서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본다. 그러다가 엘로이즈가 눈을 맞춰 오면 당황하여 시선을 피한다. 한동안 그녀들 사이에서는 시선의 결투가 벌어진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시선으로 엘로이즈를 탐색하며 그려진 초상화는 당연히도 그녀의 진짜 모습을 담지 못한다. 기껏해야 마리안느가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말했듯이 미술의 ‘규칙과 관습’에 짜 넣은 모습일 뿐이다. 엘로이즈가 말한다. “생명력은 없나요? 존재감도?” “당신을 닮지도 않아서 슬프네요” 엘로이즈를 담는 것도 자신을 담는 것도 실패한 이 죽은 그림을 마리안느는 분에 차서 뭉개버린다.


엘로이즈의 혹평도 혹평이지만, 마리안느에게도 이 그림이 눈에 찰 리는 없다. 무엇보다 마리안느가 처음 본 엘로이즈의 얼굴은, 그녀가 오랫동안 꿈꿔 왔다고 말하는 달리기로 절벽을 향해 내달리던 순간의 얼굴이었다. 자신의 의지에 반해 수녀원에서 집으로 끌려 오고 산책조차 금지되었던 엘로이즈가 실로 오랜만에 맛 본 해방의 순간, 엘로이즈의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바로 그 순간의 얼굴과 마리안느는 마주했던 것이다.



둘의 관계는 엘로이즈가 초상화의 모델이 되겠다고 나서면서부터 일종의 우호적 교전 상태에 돌입한다. 그리고 엘로이즈의 엄마가 잠시 떠나면서 이 집에 남게 된 세명의 여성,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그리고 하녀 소피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가부장제의 대리 수행자다. 그리고 이 가부장제의 감시하는 시선이 사라지자 세 여성들의 수직적 권력관계는 평등하고 합리적인 공동체로 변모한다. 그들에게 신분과 위치로 강요되었던 각자의 역할은 사라진다. 주인집 아가씨인 엘로이즈가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마리안느는 알아서 와인을 따라 마시고 하녀 소피는 여유롭게 앉아 수를 놓는다. 시아마는 이들의 새로운 질서와 조화를 이 단 한 컷의 쓰리숏으로 담아낸다. 주방은 그들이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거나 함께 모여 시끄럽게 웃고 떠들며 카드 게임을 하고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사이의 질서도 흔들린다. 그림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던 엘로이즈가 마리안느를 자신의 자리로 데려와 “당신이 날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탁월하게 화가와 모델이라는 관습적 시선의 권력 구도를 전복시킨다. 그리고 소피의 낙태를 지켜본 후 마리안느가 그 순간을 재현하며 엘로이즈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지시’를 하는 장면에 이르러 이 둘의 주체와 객체로서의 관계는 혼란스럽게 무너진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모델인 동시에 마리안느가 여성이라서 그릴 수 없었던, 허락되지 않았던 순간들을 그릴 것을 종용하는 지시자이자 해방자가 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은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돌아오고 그녀가 결혼을 위해 밀라노로 떠나게 됨으로써 끝난다. ‘규칙과 관습’으로부터 해방되었던 시간은 짧게 지나가고 그들에게 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기억이다. 그들은 기억한다. 마주 보고 누워 서로의 얼굴을 새겨 넣었던 순간들을,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렸던 그림들을, 오직 둘만 아는 어느 책의 한 페이지를. 이별의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려는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는 말한다. “뒤돌아봐”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위해 기꺼이 에우리디케가 되어 두려움에 가득 찬 오르페우스에게 명령한다. 우리의 사랑을 응시하고, 기억하라고. 그리고 마리안느는 선명히 기억한다. 타오르는 불길과 사랑했던 여인을. 그 불가항력의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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