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월 십일일 수요일
어느 화창한 사월의 봄날, 해는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고, 일찍이 핀 벚꽃은 어여쁜 제 모습을 거두고, 단단한 잎을 피워내며 다가올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육 개월 만에 만나는 지인과의 약속에 나는 지난해에 내가 소소하게 모아놓은 책갈피와 우연히 들렸던 카페의 향긋하고 산미가 있는 원두를 쇼핑백에 담아 가져간다. A와의 만남을 기다리며 나는 익숙한 사거리의 횡단보도 한편에 서 있었다.
저 멀리서 옅은 갈색의 트렌치코트를 손에 건 채 환하게 웃는 얼굴로 걸어오는 A. 내가 반했었던 그 환한 웃음 역시 그대로다. 나는 저 밝음에 매혹당했지. 내게 없는 밝음, 나는 절대 가질 수 없었던.
평생을 무덤덤한 무채색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았었다. 빛을 볼 수는 있었지만 나 자체는 암담했다.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 누가 얘기했던 평생 색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색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가상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와는 조금 다른, 나는 색을 볼 수 있었으나 정작 나를 색칠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A에게 받은 노란색 프리지아 꽃을 보며 생각했다. A를 닮은 화창하고 밝은 봄날의 프리지아. 꽃집 사장님이 프리지아는 곧 나오지 않을 거라고 얘기하셨다고 했단다. 그래서 당신은 이 꽃을 구하기 위해 여러 꽃집을 방문했다고도 했다. 나에게 이 프리지아를 선물하기 위해서.
이유에 대해 구태어 묻진 않았지만, 기뻤다. 내가 이 꽃을 보고 좋아할 거라 생각한 당신도. 나를 위해 준비한 이 꽃도. 그리고 당신을 닮은 꽃을 받아 행복한 나 역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