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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Apr 1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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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월 십칠일 월요일


감각이란 무엇일까. 난 타고나길 예민한 성격인 줄 알았으나 살아가면서 나만큼 둔한 곰도 없거니를 깨닫게 되었다.


자, 나의 둔함은 어느 정도인지 가볍게 설명하자면 학생 시절, 학원을 다니던 무렵 날 좋아한다고 고백한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지를 다른 반 친구들과 선생님까지 알았지만, 고백 그전까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고, 같은 반 친구의 작은 다툼도 그들이 시간이 지나 말하기 전까지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였다. 멋진 풍경을 봐도 나무구나, 강이구나 하는 단조로운 시각적 감상뿐이고, 어딘가에서 벌레가 나타나 비명을 지르는 동거인의 목소리에도 무심하게 벌레를 잡아줄 뿐이다.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주변에 무감각해 엄청나게 큰 바퀴벌레가 아닌 이상 나는 곧잘 발견하지 못한다. 자주 가는 카페의 천장 무늬도, 컵받침의 형태도 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온 세상에 무감각하며 무신경하다. 심지어 눈치까지 없으니 정말 세상 살아가기는 글렀다.


눈치 빠른 사람은 되려 눈치 없는 척을 한다고, 눈치 없이 세상 사는 게 제일 편하다는 인터넷 속 글들을 보면 괜히 속상해진다. 물론, 나는 내가 둔하기에 알아채지 못한 것들이 많으며, 그 덕에 꽤 편하게 살아온 걸지도 모른다.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인간관계들과 사람들의 속사정을 무시한 채(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정말 몰랐다) 살아왔으니 할 말은 없다.


나는 예민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다정함은 예민함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미리 살피지 않으면 상대를 배려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여전히 내게 예민함이란 갖추기 쉬운 감각이 아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불편함을 가질 거란 걸 머리로는 알아도, 막상 그 상황이 되면 그것을 깨닫고 행동하기란 도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예술을 사랑하는 내게 예술은 무척 어렵지만, 그렇기에 동경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찍이 예술에 재능이 없는 것을 알았지만,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고 바로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해설집을 이리 살피고 저리 뒤져보아야만 그 작품을 절반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기민하고 예민한 섬세함을 난 사랑 한다.


섬세함과 예민함은 조금 다른 단어이지만, 보통 예민함의 단어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많이 쓰이곤 한다. 그러나 나는 정말 예민함을 사랑한다. 가볍고 작은 자극에도 반응할 수 있다는 것. 얇디얇은 막을 쓰고 세상의 외부 자극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 그런 면모들로 세상은 예민한 사람들에 의해 바뀌어간다. 당연했던 것들을 당연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그들의 덕택이다.


언제는 예민함을 공부하기 위해 늦은 밤, 친구들과의 수다가 한창이었을 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어 친구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이어했다가 질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들의 답변은 모두 한결같았다. “왜냐니? 그건 당연한 거지!” 왜, 당연할까? 그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다. 성정이 예민한 사람들은 상대방의 예민한 부분을 알아채고, 그 점을 헤집으려 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 점을 학습하고 무척이나 그 늦은 밤의 나의 만행을 반성하는 중이다.


나의 둔함에 대한 혐오는 이것이 무례함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간혹 내가 둔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성 부족이지 않을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사실 나의 사회성은 좋지 않아 인간관계에 대한 내 평판은 바닥을 치고 있는데 나의 주변 인간들이 그 모든 걸 받아주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걱정 말이다. 술을 먹던 어느 날, 친구는 인간관계를 사실적으로 다룬 웹드라마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한 인물이 나와 무척이나 비슷하다고 했다. 취중진담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다음 날, 나와 닮았다는 인물이 나온 웹드라마를 보았는데, 이게 무엇인가! 누가 봐도 친구 하기 싫은 유형의 사람이다. 자기만 알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는 안하무인 유형의 인간 말이다. 그 인물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신의 세상이 전부인 마냥 살아가고, 악의 없이 다른 개구리들에게 돌을 던지던 인물이다. 악의는 없지만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인물. 그걸 알고 나니 나는 길지 않은 내 삶의 전반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친구에게 다시 물을 수 있었다. 정말 나와 그 인물이 많이 닮았냐고. 그러나 친구는 그렇지는 않다며, 그냥 가볍게 화제를 전환시켰다.


내가 상처를 받는 것보다, 상처를 주는 것에 깊은 두려움이 있다. 심지어 내가 상처를 줘놓고 그것도 모른다면 너무 극악무도한 인간이 아닌가. 그런 인간의 모습이 될까 봐 매번 인간관계에 대한 책을 독파하고, 밤늦게는 철학적 사유에 깊이 빠져든다. 스스로 해결이 가능하지 않으나 이런 고민을 계속하는 건 나는 사람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세상엔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있고, 그들만의 작은 세계를 존중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것은 즐겁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몰랐던 세상의 비밀을 알아낸 기분이라 몹시 들뜬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나는 내가 보는 세상만이 전부라 믿는 둔함을 가지고 있어서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모르는 걸까. 그래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는 걸까.



나는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누군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모르고, 나의 좁디좁은 세상을 조금씩 늘리며 살아간다. 열을 가르쳐주면 겨우 하나를 아는 열등생이라 그런 걸까. 이런 내가 무척이나 아쉽다. 그렇기에 지치지 않고 나의 선생님이 되어주는 모두에게 감사하다. 가르쳐준다면 열심히 배울 테니 부디 나를 포기하지 말아 주길.


나는 누군가를, 혹은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며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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