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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Sep 07. 2021

영화 <버닝> 감상평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



01.  영화<버닝>은 많은 질문을 양산하지만, 이 질문들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인물이 종수(유아인)라는 것이 흥미로울 뿐이다. 극은 종수가 두 명의 인물을 만나 관계를 맺고, 그들과 이별하는 과정을 그렸으며, 영화 속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은 종수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수만이 상황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영화 <버닝>의 화자가 왜 종수인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미(전종서)와 벤(스티븐 연)이라는 인물을 살펴봐야한다. 또한 필자는 <버닝>이라는 텍스트 하나만을 보려한다. 종수를 ‘현재 한국사회를 사는 20대 남성’이라는 조건을 붙이는 순간 <버닝>의 여러 해석에 대한 길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02. 서로를 이용하는 해미와 종수.

종수와 해미는 우연히 만나 섹스를 했을 뿐이다. 그런 종수는 밴에게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해미에게 “옷을 함부로 벗는 행위는 창녀나 하는 행동”이라 말한다. 필자는 이것을 종수의 질투라 이해하며 그가 해미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종수에게 해미는 사랑이 아닌 하나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해미 혹은 그 존재로 파생되는 것은 종수의 쾌락을 포함한 욕망을 배출하는 것이 목적으로 등장한다. 그에게 그녀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며, 섹스와 자위행위 등을 하고, 자신의 소설을 쓰는 그녀의 집은 욕망을 풀어내는 공간이 된다. 그렇기에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듯 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며, 욕망의 배출구인 해미가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극 속에서 해미가 갖는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카드 값이 연체됐어도 아프리카로 여행을 가고, 재미로 팬터마임을 배운다. 자신에게 처한 상황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해미는 늘 무엇인가 갈구하는 삶을 살며,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서 사는 인물이다. 이런 그녀는 종수의 집에서 대마초를 피우며 “오늘이 제일 좋은 날”이라 말한다. 그러나 정작 해미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종수를 친구라 생각했으나, 종수는 해미를 욕망의 배출대상으로 여겼다. 또한 벤과 함께 누리는 것들 중 그녀의 것은 없었다.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린 채 맛있게 먹는 것처럼, 자신의 집과 유사한 종수의 집에 벤의 차를 타고 온 해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잊은 듯 행동한다. 거짓을 바탕으로 했으나, 그것의 사실과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늘 채우고자 했던 욕망이 채워졌다고 착각했고, 그것을 완벽한 충족이라 믿었다. 그 직후 대마초를 피우면 웃음이 난다던 해미는 눈물을 흘리며, 선셋투어에서 원했던 것과 같이 노을처럼 사라진다.

극 중반 해미는 카메라를 등지고 오로지 어둠 속에만 갇혀 춤을 춘 후에 사라진다.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과 해미의 인연과 같이 신기하게, 벤의 심장 박동 소리와 같은 타악기의 선율과 함께, 마약에 취해 어둠과 노을, 어스름한 빛이라는 세 개의 경계가 그려진 풍경을 등진 채 사라졌다. 이것은 일종의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하는 제의(祭儀)같이 보인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욕망을 채웠다. 영화 <버닝> 속에서는 인물이 소망하고 꿈꾸는 것을 이루는 인물은 해미가 유일하다. 벤은 자신이 태울 “비닐하우스가 많”은 곳에서 종수에게 살해를 당했고, 종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풀어낼 수 있는 통로인 해미가 사라졌다.  

필자는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가 됐고, 그 의미를 찾고 영화의 세계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가짜라 할지라도 그녀가 원하는 삶을 찾은 후에 사라졌기에 감독 이창동은 해미의 생사에 대해 방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종수에게 해미는 일종의 수단이기에, 그녀의 만족, 욕망의 충족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해미라는 배출구가 사라진 그는 집요하게 벤을 쫓고 결국 그녀가 살해했다고 믿는다. 종수가 해미는 죽었다고 결정함으로서 그녀는 진짜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으며 종수가 믿는 것이 사실이 되어버린다. 결국 종수의 마음이 해미를 죽인 것이다.


 03. 대척점이자 질투의 대상, 벤

해미가 사라진 후 벤과 종수가 남는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필자는 도식적인 구조를 좋아한다. 그래서 해미가 사라지는 제의(祭儀)의식 같은 장면을 감상한 후, 해미는 노을이요, 벤이 땅이며, 종수가 검은 하늘이라는 설정을 쉽사리 벗어 던질 수 없다. 이 단편적이고 촌스러운 설정에서 중요한 것은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노을이 사라진 후에 밤하늘(종수)과 땅(벤)의 관계다. 두 존재의 영역을 구분짓는 존재가 사라진 이후, 두 개의 존재는 하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무엇인가를 태웠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두 사람의 차이점은 자신의 의지다. 종수는 아버지의 강요로 어머니의 옷을 태웠고, 벤은 태워주길 기다리는 비닐하우스를 선택해 태웠으며, 벤은 더 나아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통제 가능한 상황에서만 물건을 태웠다. 벤의 논리라면 종수는 태운 것이 없는 인물이라 치부 될 수도 있다. 방화행위를 통해 느끼는 생동감은 벤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켰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해미를 통해서만 욕망을 이룰 수 있는 종수는 동일한 것을 느낄 수없다.

흥미로운 것은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행위 등을 통해 생동감이라는 욕구를 충족시켰고, 계속 그것을 지속하면 그녀와 같이 영화 극속을 떠날 수 있으나, 그는 종수에 의해 죽음을 맞았기에 해미와 같은 사라짐은 맞이할 수 없다. 등장인물 중 한명은 종수가 죽었다고 판단함으로서, 또 다른 사람은 종수에 의해 살해됨으로서 두 사람 죽음을 맞았다.

극중에서 인물 세 명이 만나는 장면은 빈번하게 나오는데 이때의 인물배치는 흥미롭다. 처음 세 인물이 만나는 장면은 원탁의 음식점 테이블이다. 이때 해미와 종수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은 벤이지만, 해미를 태워 집으로 가는 것은 낡은 용달차를 대신한 포르쉐다. 그 이후 종수는 벤과 해미가 나란히 앉아서 손금을 보고 마술을 하는 것을 바라보는 입장으로 위치가 바뀐다.

그 직후 담배를 피우며 해미에게 벤에 대해 묻는 장면에서 두 사람은 정면을 보지만, 그 다음 쇼트에는 종수가 해미를 살짝 등지고 벤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주방을 바라본다. 이 장면만을 본다면 종수에게 포르쉐로 대변되는 벤의 자본과 그 사람 자체가 선망 대상일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벤과 그가 가진 것을 선망하는 것이 아니라, 벤이 해미를 소유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질투를 하는 것이다.

결말에 이르러 질투만을 하는 종수는 벤을 능가한다. 벤은 무생물(비닐하우스)와 생물(해미)을 죽일 수 있었을 뿐 자신의 욕망을 통제한다. 그러나 종수는 무생물(포르쉐 혹은 벤의 자본)과 생명을 가진 존재(벤)을 죽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욕망의 배출구인 해미가 죽였다고 판단해 극속에서 죽음을 내렸다. 종수는 생명이 없는 것과 생명을 가진 생물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게 할수있”게 된 것이다. 바로 그 말을 뱉은 벤과 그가 소유한 것과 자신의 욕망의 배출구인 해미의 생명을 갖고 말이다.


04. 종수는 왜 영화 <버닝>의 주인공이 됐을까?

종수의 의혹과 심증이 그녀를 죽었다고 판단한 후에 벤은 살해된다. 이후 종수는 살인을 했기에 기존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더 나아가 욕망을 해소할 대상(해미)과 대척점에 있는 대상(벤)이 사라진 후, 종수는 무중력의 세계 그 자체가 됐다. 종수의 세계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며, 선망과 질투의 반대지점에 있는 인물을 능가하며 그를 사라지게 했기 때문이다. 종수의 세계는 마치 빛이 사라진 후 어둠과 땅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해미는 존재하지 않는 것(삶의 의미, 허상, 메타포)을 쫓는 인물이며, 벤은 물건을 태우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인물이다. 두 인물 모두 ‘삶의 의미’를 찾고 질문을 하고, 나름의 충족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주인공 종수는 그들과 다르다. 자신의 욕망에 대해 질문하고 그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해미와 벤의 존재여부를 결정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소설, 상상, 실재여부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버닝(Burning)이라는 제목은 무엇인가 타고 있음을 뜻하며, 영화 속에서 물질적으로 발화를 한 것은 벤이지만, 종수가 사는 세계 자체도 발화하여 무중력 상태가 됐다.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내리는 자, 자신의 세계를 전복시켜 무(無)의 상태로 되돌리수 있는 사람이 종수이기 때문에, 감독 이창동은 <버닝>의 주인공을 종수로 선택했을 것이다.

살인 후 종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그 자리를 벗어난다. 이로써 세계는 닫히지만, 영화를 관람한 이들에게 수많은 의미가 파생된다. 여러 의미 중 어느 하나 틀린 것은 없으나, 명징한 정답 역시 없다. 필자에게 <버닝>은 ‘영화 속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의미와 정답, 진실과 거짓이 없기에 명확함이 없는 것이 영화 <버닝>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수많은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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