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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뻬릴 Jul 17. 2021

멈춰버린 이야기에 대하여

메루 읽기 I

2018년 봄, 우리 곁을 떠난 메루메루를 기리며.
주인님을 찾아 유토피아 없는 여정 속에서-


나는 아무 이야기도 할 게 없습니다. 저는 제 삶이 언제나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습니다.[1]


아무 이야기도 없다는 말은 항상 거짓이다. 반드시 서사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더라도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하다못해 광인들조차도 생존을 위해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며, 자신이 살아있다는 알리바이가 되어줄 한 조각의 짜인 단어들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스스로에게 이야기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보다는 그가 이야기를 숨기고자 하는 의도를 파헤치는 것이 옳으리라. 실제로 몇 편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읽힌 메루 씨의 경우라면 더더욱.


보통 이야기를 숨기고자 하는 의도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을 해석이 끝난 존재이자 역사의 한 순간으로 물화시키는 폭력들로부터 회피하기 위함이다. 영구적으로 변화하며 살아 숨 쉬는,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랑받고 싶은 것이 은둔의 파토스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물화되지 않는 영생에 대한 욕망이 별로 없었다. 그는 대상화를 면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사회의 불쌍한 피해자”를 “피해자라고 부르지는 말”자는 주장이 얼마나 “같잖은 이야기”인지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1]. 심지어 그는 “세기말 하모니”에 대한 서평에서 “여자애들을 대상화하는 시선조차 느껴지지 않았음”을 아쉬워하며, “이것만 쓰면서도 발기할 수 있었던 거야? 당신은 인간으로선 합격이라도 중요한 점에서 불합격이야!”라고 저자에게 일갈한다[2]. 그에게 상대를 내 욕망에 포섭하는 것은 그토록 중요한 점이며, 자연히 자기 자신 또한 욕망의 대상으로서 끌어당겨지길 원했다.


사라졌어! 사라졌다고! 누가 날 좀 옭아매봐![3]


그가 남긴 단 두 편의 암호문 중 하나는 쓰레기인 ‘나’를 잡아먹으려는 소년의 이야기다[4]. 소년은 쓰레기만을 먹는다. 쓰레기만을 먹도록 문신 새겨진 소년과, 쓰레기로 낙인찍힌 ‘나’는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 타자들이다. 다만 소년에게는 역할이 주어졌고,‘나’는 누군가의 소유였으나 모든 역할을 다 해 버려졌다는 차이가 있다. 화자인 ‘나’는 소년이 말랐음에 죄책감을 느끼며 음식을 주고자 한다. 하지만 ‘나’가 소년의 문신에 느낀 불쾌감을 지적하자마자, 소년은 ‘무례하게도’ 스스로의 얼굴 가죽을 삼켜버린다. 인간이 아니면서 사회적 역할만을 가진 소년은 주체성이 결여된 존재이고, 그는 새로운 주인의 감정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명령 없이 행동한 소년에게서 ‘나’는 곧장 역할을 지워버리고 그를 쓰레기로 만든다.


이 글은 타자들 사이에 소통이 가능한지를 논의하는 매개가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런 윤리학적 논의 이전에, 이 글은 소년이 쓰레기로 전락하는 과정이 ‘나’가 쓸모를 잃고 소년에게 건네지는 과정과 동일했으리라는 상상을 하게 한다. ‘나’는 누군가의 소유로서, 혹은 종속된 피억압자로서 명령받을 때 쓸모 있는 존재이다. 나는 그 지배관계 안에서 살찌고 부유하다. 그렇지 않은 나는 쓰레기로 추락한다. 물론 종속되지 않은 ‘나’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문제는 그 자유가 ‘나’를 아무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을 때,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느냐는 것이다.


메루메루는 메루메루거야. 메루메루는 주인님 거야. 이건 나야. 그리고 내 인형이지.[3]


메루 씨가 소위 말하는 ‘실존주의적’ 자유를 꿈꾸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자유란 정확히는 어떤 클리쉐들, 캐릭터들 사이를 부유할 자유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유는 그가 생각하는 대상화 개념과 대립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다면, 다시 어떤 자가 되면 된다. 대상화와 정체화는 억압과 해방이라는 목적에서 다를 뿐 형식에서 구분할 수 없다. ‘레이디 셜록’에 대한 서평은 그가 자유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선명하게 나타낸다[5]. 그는 주인공 셜록을 횡단하는 자이자 교란을 시도하는 자로 정의한다. ‘셜록’은 적극적으로 여러 정체성을 옮겨 다니며, 주변에도 그러한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모든 게 분장이고 저는 아무도 아니라구요! 라고 웅변하는 듯한” 셜록의 행위에서 그는 해방감과 절망감을 동시에 느낀다. 다만 그가 더욱 주목한 것은 절망보다는 해방이다. 그는 “레이디 셜록”의 작가인 김달을 고평가 하며 다음과 같이 적는다.


(…) 셜록이 수행하는 교란은 환상의 영역에 걸쳐 있고 그것을 욕망하는 자들이 있다. 주인공이 환상으로서 이야기들을 충분히 수행하고 갈등을 무마하고 나면 주인공에겐 이제 다시 황야로 홀로 나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 그러면서도 황야를 방랑하고자 하는 가장 큰 동인인 환상의 재생산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는 것. 황야로 깊이 들어갈수록 더 밀도 높은 환상을 욕망하게 된다는 것. 이 선순환을 크게 존경하고 있다.


자신을 자신의 소유이자 창작물로 여기는 이에게, 작가의 작업 방식에 대한 존경은 삶의 태도에 대한 동경으로 치환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선순환이 계속된다면 그는 이야기를 하며, 누군가를 홀리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는 여러 가면들 사이에 새겨진 삶들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환상을 생산해내고, 그 환상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환상의 생산이 아닌 재생산이다. 그는 스스로에게서 환상을 재생산시키는 힘은 황야로 깊이 들어가는 데서 나오며, 황야로 깊이 들어가려는 동인은 다시 밀도 높은 환상을 욕망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식은 명백히 자기 순환이다. 프로이트의 말마따나 환상 자체가 현실화될 수 있는 무언가를 바라는 감정이라 할 때, 앞선 그의 분석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황야가 곧 환상이며 욕망이며 횡단이다.


그가 그린 환상의 재생산 도식에 자리 잡은 모순을 지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황야로 나아가는 행위 그 자체다. 가면을 계속해서 바꿔 쓰는, 다음 사건으로 달려 나가는 행위 자체가 더욱 농밀한 욕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가 서평에서 주목했던 폴리페모스는 행위를 멈춤으로써 절망에 빠진 대표적 사례다. 다른 키클롭스들은 그에게 적이 누구냐고 계속해서 되물었고, 폴리페모스는 적은 ‘아무도 아니’라는 답 외의 무엇도 내놓지 못했다. 그렇다면 폴리페모스를 구원하기 위해, 그리고 호명하기 위해 던져져야 했던 질문은 무엇인가? “너는 무엇을 하는 자이며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를 인정하며 옳게 호명하려는 시도는 폴리페모스와 오이디푸스의 관계의 변화 속에서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 폴리페모스는 압도적인 폭력, 대상화를 행사하여 ‘아무 것도 아닌 자’를 ‘저주받을 자’, ‘복수의 대상자’로 고쳐 불러야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할 이야기가 없다는 말은, 정확히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이야기를 할 수 없음을 뜻한다. 나는 메루 씨가 이야기는 함으로써 완성됨을, 삶은 삶으로써 살아지는 것임을 몰랐으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분할된 정체성들을 자유롭게 옮겨 갈아탈 수 없었다. 이는 그가 스스로 억압을 재생산하는 자는 아닌지 고민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으로 태어났으며, 그가 어떤 이름을 붙이든 구조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더 슬픈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다시 구조를 강화하고 있다는 통찰이었다.


창녀랑 성녀랑 개념녀랑 현모양처는 가짜 여성이고 그 안에 진짜 여성은 숨 막힌 채 드러나지 못하고 사회에서 강요하는 여성성만 수행하다가 죽는다는게 페미니즘임. 여성으로태어난당신절대원본이될수없습니다 무엇에대한 원본이되어도 여혐을 재생산합니다[6]


자기 자신이 억압자라면 과연 나는 자유를 누릴 자격을 지녀도 괜찮은가? 그의 글에서 자격에 대한 강박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가 완성시키지 못한 소설에서 화자는 “더 이상 어떤 불합리도 규탄할 자격을 가지지 못했”고 이는 화자인 ‘나’가 사로잡힌 자로서 패배자이기 때문이다[7]. 그가 자신의 성노동 경험을 토로하는 글에서는 “그렇게 살기 싫다는 말 남 앞에서 실수라도 못해요.(…) 고생 모른다고 사람 속 모른다고 왜 인성이 저따위냐고 소리 듣고 친구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고백하는데[1], 이는 다시 “당신처럼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여성들을 항상 기억하”라는, 시작은 비아냥이었을지 모르나 결국 그의 지침이 되어버린 문장으로 이어진다[8]. 그가 누리려는 자유가 그처럼 되지 않으려는, 고정된 자리를 지키려는 이들에 대한 공격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높은 수준의 성찰 속에서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남들)에게 애도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는 스스로가 “무언가를 애도할 수 없는 인간”이라며,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9]. 그 이유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걸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사람은 없으며, 그렇게 살아야 함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 또한 없기 때문이다. 그 삶에 이유를 붙여 대상화하는 것은 “뭘 잘 모르는 것”이다. 그는 행복과 절망은 애초에 뒤섞여있고, “이 일(성노동)을 계속 하면서도 존엄을 유지하고 착취당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6]. 이로 미루어볼 때 그에게 삶이란 그 자체로 총체적인 성격을 가진다. 삶에는 늘 당사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를 재단하거나 규정할 권리를 가진 타인은 없다. 곧 삶은 정치적인 이유로 토막 날 수 있지만 가능한 토막 내서는 안 되며, 토막 난 삶을 정치적 이유에서 사용하는 것은 피할 수는 없지만 옳은 것은 아니다. 적어도 애도나 연대와 같은 형식을 통해 이를 기만해서는 안 된다.


내가 느끼는 슬픔이 당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일도 아닌 일에 연민하거나 비참해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한다[6]


뭐 연대는 좋은 일입니다(끄덕끄덕) 이지만 본인이 속한 정체성에서 주된 정서들을 모른 척 하진 말아주시길[10]


그러므로 그는 제멋대로 황야를 횡단할 수 없다. 그는 다른 정체성으로 옮겨가 그들의 행위를, 그들의 감정을 자기 것인 양 베껴서 수행할 수 없다. 그것은 무례한 일이며, 자기처럼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에게 박탈감을 주고 억압을 재생산하는 일이다. 그는 그나마 ‘당사자성’을 띤 영역에서만 발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본디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평등한 행위의 권리가 있다는 적극적 자유보다, 각자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유를 내세우게 됐다. 결과적으로 그가 할 수 있었던 말의 전부는 자신에게는 이야기가 없고 항상 행복했다는 또 다른 사실이자 기만이다. 나는 살아있고 돈도 충분히 벌고 있으므로 충분히 행복의 당사자로서 행복하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통해 삶들 사이로 미끄러지기엔, 나는 여전히 피/억압자이며 자격이 없다.


가끔씩 “그의 감각을 지배”했다는 그의 미완성 소설은 잃어버린 자유에 대한 내용이다[7]. 화자인 ‘나’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독백한다. ‘나’는 ‘너’에게 구속되어 강제로 생존하게 된다. ‘나’는 타인의 삶보다는 자신의 삶을 중히 여기는 인간이기에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합리를 규탄할 자격을 스스로에게서 박탈한다. ‘나’는 “내 존재의 불결함을 다시금 감각”해야 했기에 자해조차도 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세상을 증오”하는 것뿐이다. ‘나’는 ‘너’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끼던 끝에 정신에 과부하가 걸리며, “그래서 네가 내게 말을 걸었을 때 나는 절망”했다.


이 짧은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너’가 ‘나’에게 말을 걺으로써 절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절망은 가지고 있던 어떤 근본적인 희망이 무너지면서 발생한다. 이때 ‘나’가 가지고 있던 희망이란 삶이 아니다. 이미 ‘너’는 ‘나’를 생존시키며 밥을 주고 약을 발라준다. ‘너’는 ‘나’를 학대하지도 않는다. ‘나’가 희망하는 것은 삶을 넘어선 가치로서 자유이다. ‘나’는 자유롭고 싶지만 이미 너무 많은 감각을 ‘너’에게 연결시켜 두었다. ‘나’는 ‘너’를 틀에 가둬 애정 하지도 증오하지도 못한다. ‘너’는 ‘나’에게 말을 걺으로써 ‘나’를 온전히 물화하는 가부장의 위치에서도 빗겨나가 버린다.‘나’와 마찬가지로 ‘너’의 삶 역시 총체적인 무언가 이며, ‘나’가 꿈꾸는 대상화/정체화된 존재 사이의 방황은 영영 불가능해지고 나는 버거운 ‘너’의 삶을 직접 대면해야 한다.


"The Masochist"(2009) by Wenqing Yan


그가 남긴 다른 한 편의 암호문이자 가장 시에 가까운 산문이 “목의 뼈”이다[11]. 이 글은 그의 다른 글과는 다르게 상징과 은유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고, 이후 그가 어떤 글을 쓰게 됐을지 짐작케 한다. 화자인 ‘나’는 목뼈를 가지고 있다. 목뼈는 ‘A’가 심어준 것이다. ‘A’는 목뼈 덕분에 ‘나’가 이렇게 잘 컸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 ‘나’의 목뼈가 뼈가 맞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나’는 뼈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확인하러 사냥터로 향한다. 사냥꾼들은 ‘나’의 검은색 목뼈를 보고 목뼈가 아닌 마개라고 말하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마개가 없어졌기에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나’는 끝끝내 고기를 먹지 않는다.


뼈가 아니지만 목에 튀어나온 것은 목울대를 연상시킨다. 아담의 사과라고도 하는 울대뼈는 통상적으로 남성성, 혹은 말이 울려 나오는 장소로서 언어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단단한 목뼈가 너의 몸을 다스려주고 있기 때문에” ‘나’는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엔 실체가 없고 혼란스럽다. 그것은 정확히는 뼈가 아니며 어떤 진실이 용기(vessel)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가로막는 마개이다. 남성성과 언어가 나를 지켜주는 세계, 가부장제의 세계에서 ‘나’는 고기를 잘 그을리는 쓸모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목뼈를 꺼낸 목은 여성의 그것이 되며, ‘나’는 실재를 드러내게 되고 부끄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끝내 고기를 먹지 않는데, 이는 그가 가부장제의 부역자일지언정 그 희생양들을 잡아먹을 수는 없다는 최소한의 윤리이다.


평면적으로 볼 때 가부장제를 사는 명예남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짧은 소설인 “목의 뼈”는, 메루 씨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자기 이미지를 화자인 ‘나’에게 반영하는 순간, 정 반대로 읽힐 여지를 남긴다. 그는 평소에 (돼지) 고기를 매우 좋아했고, 육식을 멈출 마음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쓸모없다 생각했으며, 자기 자신이 가정에서 원하는 대로 성장하지 않았음도 알고 있었다. 작품 해석에 작품 외적인 정보를 반영하는 것이 무리가 없다면, 윤리적인 존재인 화자 ‘나’는 실제로는 저자 자신과는 거울처럼 정반대인 존재다. 그렇다면 정석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가 작중에서 지키려 했던 윤리를 욕망으로, 획득한 것을 잃은 것으로, 버리고자 하는 것을 갖고자 하는 것으로 한 번쯤 뒤집어 바라보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싶다.


그렇게 뒤집힌 이야기는 그가 가장 욕망하고 있었던 것은 차라리 더욱 단단한 뼈가 아니었을지 의심케 한다. 저자인 그는 고기를 먹는 마개 빠진 자이다. 그는 지금의 생활을 포기할 생각이 없지만, 늘 한 구석에 그를 완전히 가려주고 보호해줄, 그리고 그를 성장시킬 굳건한 흰 뼈를 필요로 한다. 그 뼈는 쇄골도 척추도 아닌 목뼈이다. 나는 그 목뼈를 어떤 윤리적인 책임을 거부한 채 여러 대상화된 정체성 사이를 옮겨 다니며,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픈 이야기를 말하게 하는 선천적인 기관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러나 그의 유전적 성별과 성장 배경은 그에게 목뼈를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그의 척추이자 쇄골-삶의 준거로써 페미니즘을 이식해야만 했다. 그리고 온전히 자기의 책임이 된 그의 삶은, 그의 윤리는 그의 바람대로 그가 돼지를 죽이지 않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가 그 스스로를 죽이는 것은 막지 못했다.


내가싫어하는건 첫째도책임감 둘째도책임감 셋째도책임감이야[3]


나는 여성 성노동자였던 그에게 주체로서 홀로 서야 한다는 부담과 윤리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감조차 잡지 못한다. 다른 여성들과 어떻게 대화 나눌 것이며, 그/녀들의 해방까지를 어떻게 담지해내야 할지 그는 항상 고민했고, 그 고민은 타인이 오롯이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는 때로는 성적 성향을 통해, 때로는 그가 향유한 예술작품들을 통해 약간의 자유를 맛보았다. 그러나 그가 쌓아 올린 성찰성의 육중한 벽은 결국 그의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그는 행복할지언정 살 수 없었다. 그의 많은 벗들은 그가 권한 작품들에서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읽어냈다. 그러나 하나의 이야기를 끝내야만 다른 이야기가 도래하는 세상 속에서, 그에겐 재시작이나 성장의 계기로서 끝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생전에 건조하게 주지 시켰듯 그의 죽음은 질병의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질병조차 그의 삶의 연장이었음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누가 나를 정당하게 애도”해 주기를 바랐다[3]. 하지만 우리는 그가 살아있었던 ”대가로… 그 저주의 이야기가 또 영웅담으로 우리들에게 읽힐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5]. 나는 그의 논리를 인정한다. 산 자는 죽은 자를 정당하게 애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애도한다. 나는 그의 단 한 조각도 제대로 가진 적이 없으며, 그래서 그를 되찾을 수 없을뿐더러 되찾을 권리조차 갖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잃었고, 상실에 슬퍼한다. 나는 내가 가할 수 있는 가장 압도적인 대상화로, 짧은 서평으로 그를 추모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자격과 자유라는 그의 정당한 고민을, 아무 이유 없는 무자비한 폭력-사랑으로 무시하고자 한다. 너는 무엇이냐는 혹은 너에게 어떤 자격이 있느냐는 질문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다. 나는 그저 당신과 살고 싶었고, 영원히 두 갈래로 갈라지는 끝없는 미로에서 당신과 함께 한 걸음 더 길을 잃고 싶었을 뿐이다.


Apr 14th. 2018.




참고한 메루메루의 글

1. 저는 성노동을 너무 사랑하는 성노동자입니다
2. 세기말 하모니 읽음
3. 메루 씨의 트위터 비밀 계정
4. – (무제)
5. 레이디 셜록-횡단하는 자와 이분되는 자
6. 메루메루 봇 트위터 계정
7. 과거 소설 백업
8. 메루 씨의 가장 최근 공개 트위터 계정
9. 애도할 수 없음에 대해
10. 메루 씨의 과거 공개 트위터 계정
11. 목의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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