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이 죽었다!(아만도 이아누치, 2017)
웃음에 대한 몇 가지 이론이 있다. 바흐친은 그의 유명한 카니발에 대한 논의를 통해 웃음은 지배 질서가 파열하는데서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베르그송은 (사회적) 생명의 탄력성과 자연스러움이 기계의 경직성과 충돌할 때에 웃음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바타이유의 경우 웃음은 체계 사이에서 혹은 체계 바깥으로 우리를 갑자기 이동시키면서 발생한다고 역설하였다. 웃음은 불균형을 생산하고 죽음 혹은 그 이상의 영역과 결합한다는 것이 바타이유의 논리다. 데리다는 바타이유의 논리를 조금 비틀어, 웃음은 생명을 얻기 위해 인식체계 혹은 상징체계 밖으로 나가야 함에도 바로 그 체계와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음 자체에 대해 웃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베르그송을 중심으로 전술한 웃음에 대한 논의들을 고려할 때 블랙 유머는 왜 웃기냐는 질문은 과도하게 멀리 돌아온 데다 말 그대로 '웃기는' 질문이다. 블랙코미디의 원인으로 꼽히는 "악의 경직성"이 그 자체로 같은 단어를 반복한 기계적인 진술일뿐더러, 그런 의미에서 악이야말로 모든 웃음의 공통된 근원이기 때문이다. 닫힌 체계, 영혼 없는 반복은 창조와 생명을 저해하고 그것이 곧 악의 본질이다. 블랙코미디를 기계적 자기 복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으로, 코미디의 하위 장르가 아닌 모든 코미디의 원형으로 바라볼 때 블랙 유머의 희극성에 대한 질문은 "왜 인간은 웃게 되는가?"로 수정되어야 한다. 아만도 이아누치의 2017년작 "스탈린이 죽었다!"는 (블랙) 코미디의 교범 같은 영화로 이러한 질문의 전환을 설득하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스탈린이 죽었다!"의 배경인 스탈린 시대 소련은 엄격한 체계가 인간의 삶-생활세계를 통제하던 곳이다. 그곳에서는 최고 권력자의 취향에 맞춰 모두가 체제에 적합한 인간상을 연기해야만 한다. 간혹 이 연기가 실패하게 되는데 실패는 곧장 죽음으로 귀결된다. 다만 실제로는 그 연기의 실패와는 무관하게 최고 권력자의 입맛에 맞춰 죽는 자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죽음의 집행 역시 몇 가지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다는 면에서 처벌 또한 하나의 연극적 장치라고 볼 수도 있겠다. 삶과 죽음 모두가 특정한 상징체계 아래 조직된 사회에서 그 구심점 역할을 하던 스탈린이 사라졌을 때, 그때 발생한 총체적 파열이 본 극의 웃음의 원인이 된다.
스탈린이 죽으면서 발생하는 혼란은 오묘하다. 이는 감시사회라는 특성상 사람들 사이에 연기에 대한 모순된 두 가지 합의가 동시에 맺어졌기 때문이다. 하나, 우리는 순종하는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스탈린을 사랑한다(그렇지 않은 자는 죽어야 한다). 하나, 우리는 순종하는 연기를 하고 있으며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한다(그러니 같이 살아야 한다). 스탈린 시대의 인간은 따라서 연기의 성패도 두 방향으로 가늠해야 했다. 첫째, 저 자의 체제 순응 연기가 충분히 훌륭하지 못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에게까지 피해가 닥치기 전에 당국에 신고해야 하는가? 둘째, 저 자의 연기는 연기가 아닌 것 아닌가? 혹시 저 자는 나보다 스탈린을 더 사랑하고 언제라도 날 밀고하지 않을까?
흥미로운 것은 양면적인 의심 때문에 누구도 상대의 가면과 실제 얼굴을 온전히 분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상대의 얼굴은 가면일 수도 있다. 상대의 가면이 얼굴일 수도 있다. 상대는 정말 나보다 스탈린을 사랑할지도 혹은 나를 스탈린보다 사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스탈린은 죽었고 모순이 지양되는 때가 도래했다. 스탈린이 만들어놓은 상징체계 외의 소통 방법-정치적 기회구조가 부재하기에 연극의 형식이 껍데기로 남은 채, 테제는 다음과 같이 기이하게 변형된다. "우리는 스탈린을 사랑하는 연기를 하지만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다. 우리는 진심으로 스탈린을 사랑하고 또 진심으로 서로도 사랑한다." 자신의 내용을 잃어버려 형식만 남은 연기는 더 이상 실재를 감추기에 불충분하다. 그렇게 이 기묘한 테제가 통째로 거짓임을 의심받는 순간, 사랑의 내용과 형식이 분리되어 연기의 실패가 노정된 순간 관객은 깨닫게 된다. 감시사회라는 극장이 실제로 감춘 것은 모두가 스탈린은 물론이거니와 서로 또한 사랑한 적이 없다는 냉엄한 현실이었음을.
그러니 관객에게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이제 말 그대로 웃기는 일이다. 흐루쇼프의 노심초사, 베리야의 협박, 몰로토프의 스탈린 추종, 말렌코프의 호가호위, 스탈린 자식들의 애도와 비통함 등은 깨져버린 구질서를 붙잡는 사랑의 구걸에 불과하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억지로 가림으로써 쇼윈도 너머로나마 사랑을 이어가 보려는 나약한 술수다. 그들의 허약함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것이 베리야와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의 대화다. 극 중 베리야는 그녀에게 "아무도 믿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은 나뿐"이라며 포섭을 시도한다. 베리야는 무너져내리는 극장에서는 진실이 가장 강력한 카드가 될 거라 믿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연기를 포기하기엔 어떠한 실력도 갖지 못한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받는 연기를 이어갈 수 있는 흐루쇼프 쪽에 힘을 실어주었고, 베리야가 숙청당하며 정권 장악을 위한 모든 연극이 끝나는 순간 배신당해 빈으로 추방된다. "그게 당신일 줄은 몰랐다"는 말을 남긴 채.
체제가 빚어낸 '비극적' 웃음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본 극의 도입부에는 녹음실과 오케스트라가 등장한다. 연주가 끝나갈 무렵 방송 담당자는 스탈린에게 연락하라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전달받은 약속 시간을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하고 만다. 다행히 정확한 때에 스탈린과 통화가 연결되는데 스탈린은 이미 끝난 연주의 녹음본을 요구한다. 그는 허겁지겁 가짜 관객과 대체 연주자들을 구해 실황 연주인 양 다시 녹음을 시작한다. 그는 스탈린이 이런 연기를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모르기에 어쨌든 최선을 다 한다. 상전에 대한 공포로 얼어붙은 등장인물들의 뻣뻣함이 웃음을 주는 시퀀스이다.
실황 연주를 연기하는 연극으로서 일종의 극중극이라 할 수 있는 이 도입부는 영화 전체의 축약본이다. 체계가 모든 면에서 항상 웃긴 것은, 방송 담당자와 우리를 이토록 우스운 꼴로 만들어놓는 것은 억압이 자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진실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닫힌 체제 하에서 우리의 모든 '순응적' 행동-훈육된 억압은 거짓이자 연기로 이해되며, 나머지 모든 일상은 체제에 대한 당연한 반항이자 자연스러운 생명이 되어 끝없는 폭로 속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스탈린이 말한 17분 뒤 전화하라는 뜻은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17분인가 끊었을 때로부터 17분인가? 스탈린이 쓰는 시계의 오차는 17분간 얼마나 발생하는가? 다시 녹음한 연주는 원본 연주와 얼마나 다른가? 관객까지 같아야 같은 연주인가, 아니면 레퍼토리만 같으면 되는가? 억압은 신념을 갖고 말한다. 이 모든 질문이 유의미하며, 이에 답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자연스러운 생명으로서 저항이라고. 만약 운 좋게 정답을 맞춘다면 어떨까. 겨우 시간에 맞춰 녹음된 음반을 냉담한 표정으로 낚아채가는 소련 장교의 표정이 말한다. 그것은 그저 스탈린을 따르는 연기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결과라고.
연기와 생활이, 이념과 생명이, 환상과 현실이 뒤섞여 지속됨을 인정하는 관용의 원칙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일탈을 체계의 파열로 느끼는, 존재-죽음 자체가 코미디가 되는 광소의 순간을 만나게 된다. 우리 사회를 살짝 가리고 있는 모호함의 스크린이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 걷혀질 때, 냉혹한 감시에 의해 폭로되고 법적으로 규정될 때 인간 주체는 자연성과 기계성으로 철저히 양분되고 만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체제와 인간 사이에 숨 쉴 공간을 부여하는 장막이고 안개이다. 우리 자신이 조소의 대상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식 대상이 거짓일 가능성을 전제할 수 있을 만큼의, 상대가 연기 중임을, 연기 중이 아님을 동시에 의심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가 필요하다. 셰익스피어의 말마따나 어차피 세계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 모두는 형편없는 연기자이고, 심지어는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웃음에 대한 명제를 비틀어 쓰자면, 인간 신체는 체계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체계 안의 가면과 공존할 때 비로소 주체 되기의 가능성을 얻게 된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스탈린이 죽었다!"의 주연 배우들은 이름값에서나 능력에서나 최고이다. 스탈린 시대 소련의 최고위층이 정확히 그러했듯이. 연기를 안 하는 척 연기를 하는 캐릭터들을 연기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아야 했으므로 이런 명배우들을 섭외한 것은 당연하다. 몸을 쓰는 개그에서부터 영국식 말장난과 표정 처리에 이르기까지 배우들의 역량과 호흡이 탁월하다. 한편 정치풍자극이라는 장르의 특성이나 배우들의 무게감과는 달리 본 극의 뒷맛은 무겁지 않고 깔끔한 쪽이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스토리가 친숙한 데다 반전도 없고, 극 중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많지 않을뿐더러 템포도 경쾌한 편이라 이야기에서 오는 긴장감이 적어 소품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본 극을 그저 괜찮은 작품으로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은 "스탈린이 죽었다!"가 역설적으로 가장 파열로서의 웃음에 가까웠던, 그렇기에 희극의 본질을 탐구할 수 있는 시대를 정확히 짚어냈기 때문이다. 인류가 낳은 최고의 연기자들이 그렇게 배꼽 빠지는 희극을 찍고 말았다면 우리가 촬영할 다음 작품은 조금은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의 오류를 기계적으로 답습한다면, 아마 다음 세대는 그 영혼 없는 반복에 더 크게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