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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뻬릴 Aug 04. 2021

[일본 엽서 갤러리] 교토 마루타마치역 - 교토 벤리도

100%의 일본

나는 일본 문화 개방에 직격탄을 맞은 세대다. 내가 만 11세가 되던 1998년 10월 고 김대중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일본 문화를 양성화했다. 내 안에서 이제 막 개인적인 취향이라는 게 성립될 무렵 한국 사회는 온통 쓸만한 일본 콘텐츠를 찾아 소비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내가 일본 문화에 처음 구체적인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어머니의 추천으로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탐독하면서부터다. 갓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에게 삼국지를 대체할 군담소설의 존재는 쾌감 그 자체였다. 한편 2000년대 초중반엔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 류의 소위 '사소설'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나 역시 그 틈바구니에서 몇 권인가 감상적인 글줄을 만끽했던 기억이 있다. 만화방에서 빌려다 본 책도 대부분 일본 작품이었다. 개중엔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 같은 고전들, "강철의 연금술사"와 "토미에"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길 걸작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의식에조차 남지 못할 조야한 공산품이었다. 게임은 또 어땠나. "파랜드 사가 2"(한국에서는 "파랜드 택틱스 2"로 발매됨)나 "파이널 판타지 7" 등 훌륭한 작품들이 또래 사이에서 널리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교토가 있었다. 일본 문화에 대한 선망은 교토에 대한 환상으로 직결되었다. 수천 개의 사찰과 신사, 정원으로 수 놓인 도시. 고색창연한 목조건물 사이로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는 전통 복식 차림의 사람들. 하얗게 얼굴을 분칠 한 게이코들과 본심을 철저히 숨기는 특유의 화법까지. 도쿄가 현실에서 기능적으로 일본을 대표할지언정 교토야말로 진정한 일본의 수도라는 느낌이 있었다. 교토에 갈 기회는 그리 머지않은 때에 찾아왔다. 일본에 아베 정권이 들어서고 아베노믹스가 본격화되며 엔저 현상이 뚜렷해지자 한국의 베이비부머 세대가 가족여행지로 일본에 주목했다. TV마다 일본의 주요 관광지를 소개했고 거리마다 일본풍 식당과 주점이 자리 잡았다. 항공 노선이 빠르게 늘어나며 비행기 값이 내려간 틈에, 보너스로 받은 돈을 얼마간 모아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가는 저가 항공 표를 살 수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떠난 첫 해외여행이었다.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오사카우메다 역까지, 거기서 다시 교토 역까지 기차와 지하철을 몇 차례 갈아탔다. 오사카우메다 역이 매우 복잡해 기차표를 잘못 끊었는데 직원분들의 도움으로 겨우 맞는 표로 바꿀 수 있었다. 처음 내린 교토 역이 어땠는지 지금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하늘이 맑았을까. 다만 교토에 와서 처음 들른 곳이 니죠성(二條城)이었던 것은 똑똑히 기억한다. 내가 좋아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관련이 깊은 곳일뿐더러, 발을 디딜 때마다 뻐꾸기 소리를 낸다는 뻐꾸기 마루가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니죠성을 나와 주택가 골목에서 직진하기를 15분가량, 3월 초의 쌀쌀한 날씨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고즈넉한 정취에 긴장이 슬슬 풀려갈 무렵 두 번째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교토 벤리도였다.


일본 근현대 미술 인쇄의 산 증인


교토 벤리도는 창업이 1887년(메이지 20년), 주식회사로 설립된 것이 1939년(쇼와 14년)으로 13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문화재를 보관하고 미술작품이나 엽서 등을 인쇄하는 한편 문구류 도·소매와 작품 전시를 병행해왔다. 각종 관공서와 언론, 미술관과 박물관, 사원들과 오랫동안 거래해왔는데 이쯤 되면 일본 미술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다. 벤리도가 특히 자랑하는 것은 콜로타이프(Collotype) 인쇄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콜로타이프는 1855년 발명되어 1870~1920년 사이를 풍미했던 인쇄 기법으로, 망점이 없어 색이 뚝뚝 끊어지지 않고 연속적인 농담이 표현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적은 양을 싸게 인쇄하는 데 유리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예술품이나 엽서에 많이 쓰였다고 한다.


벤리도에 전시된 수많은 액자들과 그림엽서들을 보고 있자면 이곳은 문구점이기 이전에 갤러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엽서들의 도안 대부분은 나쁘게 말하자면 전형적이고 좋게 말하면 전통에 충실하다. 교토 전통 문구점에 들리면서 기대하게 되는 어떤 미적 요소들을 그대로 옮겨놓은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된 제품의 숫자가 상당히 방대하기에 식상한 느낌은 그리 들지 않는다. 무수한 이미지들 사이에는 그 숫자만큼의 일탈과 비틀기 그리고 실패가 숨어있기에, 저마다 양식의 반복은 일어났으되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최근 작가들의 작품도 일부 소개되어 있으니 노골적인 일본풍이 싫다면 이 쪽을 노려봐도 좋겠다. 미술 엽서의 가격은 저렴한 것이 대략 2500원 정도로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몇 개 골라오기에 큰 부담이 없다. 엽서 외에도 손수건을 비롯 각종 문구류가 마련되어 있으니 여유를 갖고 둘러보다보면 하나쯤 마음에 드는 품목이 튀어나올 것이다.


복숭아 나무에 앉은 두꺼비 그림엽서. 콜로타이프에 대한 간략한 소개문이 들어있다(4th Aug. 2021)


벤리도에서 머지않은 곳에는 금전의 신을 모신다는 미카네 신사(御金神社)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혹자가 말하기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인 혼케오와리야 본점(本家尾張室 本店)이 있다. 교토 방문이 처음이라면 일부러라도 함께 들러볼 가치가 있다. 벤리도의 그림엽서에서 한 번쯤 본 것만 같은 모습의 신사와 식당이 우리를 맞이한다. 그 지독하게 낯선 친숙함. 교토에 있는 모든 장소가 묘하게 닮아 보이는 것은 어쩌면 일본인 본연의 미감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의 이미지를 갖고 교토에 찾아온 영혼들이 자신의 일부를 두고 가기 때문은 아닐까. 해외 여행객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인 관광객 본인이 가진 100%의 일본에 대한 환상이 교토라는 도시를 망점 없이 통째로 인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 역시 교토의 낯에, 관광 산업으로 먹고사는 내 고향 제주에 발자국을 남기며 생각하고는 했다. 


교토 벤리도는 현재 아쉽게도 본점을 제외한 점포들이 문을 닫은 상태다. 본점 역시 임시 상점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방문할 의사가 있다면 홈페이지 등을 자주 확인하는 것이 안전하겠다. 개인적으로는 산조토미노코지점(京都三条富小路店)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해당 점포가 다른 지점들보다도 갤러리 성격이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갤러리에 들어가는 것은, 심지어는 입장료가 없다 할지언정 나 같은 미술 비전공 시골사람에게 괜히 무서운 일이었다. 문구점의 얼굴을 빌린 교토 벤리도처럼 대중에게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전시 장소가 늘어나길 바라본다.



교토 벤리도 본점(京都 便利堂本店)

휴일 제외 10:00~18:00

주말 및 공휴일 휴무

홈페이지 : http://www.benrido.co.jp/

트위터 : https://twitter.com/kyotobenrido

위치 : 302 Benzaitencho, Nakagyo Ward, Kyoto, 604-0093,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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