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팀 계약직 입사 약 한 달 후, 나는 계약직으로 일년 정도 먼저 입사했던 수연씨와 함께 타 기관에 교육을 운영하러 갔다. 먼저 수연씨로 말할 것 같으면, 여러 이유로 회사에서 평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계약직 신입이자 짬밥이 영에 수렴했던 나는 모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을 때였고, 수연씨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와 나의 사이는 괜찮은 편이었고, 거의 처음으로 맡았던 교육 운영이었음에도 별 문제 없이 잘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내가 교육 운영하러 간 기관의 담당자 철수 팀장과 수연씨가 회식을 제안했다. 그 둘은 원래 아는 사이였고, 지금 생각해 보면 왜 회식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이상한 조합이지만 뭣 몰랐던 나는 따라갔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술자리가 끝나고 헤어진 후, 철수 팀장이 다시 나에게로 다가와 허리를 손으로 감싼 것이다. 너무 놀라서 당황했지만 나는 손을 뿌리치고 곧바로 택시를 탔다.
다음날 교육을 운영하러 가서 만난 철수 팀장은 본인이 한 짓이 생각나서 민망하기는 한 지 어색해했다. 이내 사과하려나 싶었는데, 사과는 개뿔 갑자기 내 탓을 하기 시작했다.
"술을 왜 그렇게 많이 마시나? 어..? 어!! 그, 그 알지, 여자들 술 많이 마시고.. 길에 널브러지고! 골뱅이 몰라???"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술 취해서 성추행 저지른 범죄자가 사과는커녕 적반하장에 여성 비하 발언과 저속한 표현까지.. 지금 저 미친놈이 출근길에 벼락이라도 맞아서 뇌가 터져버린 건가? 그렇다기엔 날씨가 너무 좋긴 했는데.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둘러서 저 주둥아리를 날려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처음 겪어본 나는, 정말 어찌해야 될지 몰라서, 어버버 넘어갔던 것 같다.
수연씨와 점심을 먹으며 어제 술자리가 조금 이상했다고 했다. 뭔가 일 때문에 모인 사이가 아니라 마치 접대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상대 기관 사람들이 우릴 여자로 보고 술을 마시는 것 같다고 했다. 수연씨는 그렇게 느낀다면 내가 이상한 거라고 했다. 사회경험이 어느정도 쌓인 지금의 나였다면, 어린 여자랑 술 먹고 싶어서 회식을 빌미로 자리를 만든 철수팀장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을텐데. 하지만 어렸던 당시의 나는, 철수팀장의 변태 같던 눈빛과 이상하다고 느끼는 내가 잘못이라는 수연씨의 단호함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수연씨에게 어제 철수씨가 성추행을 했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회사에 돌아간 나는 용기 내어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고 신고했다. 신고하고 조사받는 과정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성희롱 상담창구도 있고, 사건 발생 시 기관 대응 절차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적일 뿐이었다. 성희롱 상담창구라는 말이 거창해 보이지만 그저 회사에서 직원 하나를 상담창구로 지정해놓은 것이고, 대응 절차를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기관장에게 보고될 것이 명백했다. 기관장 뿐이겠는가? 당시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수연씨를 조사할 것이고, 책임자인 팀장님을 문책할 것이며, 어두운 표정으로 왔다 갔다 하는 우리를 보고 모든 직원이 알게 될 것이 뻔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신고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괜찮냐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어 신고하기는 했지만, 이 모든 것이 감당하기 너무나 힘들었다. 걱정은 꼬리를 물고 커지기 시작했다.
'철수 팀장 중앙부처 높은 공무원인데.. 혹시 나중에 내가 우리 회사 정규직 되거나 다른 곳 취업을 하는 데에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을까?'
'회사 직원들은 모두 이 일을 알까? 술 마신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신고한 후로 수연씨가 나를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 괜히 눈치 보이는데, 어떡하지. '
등등···. 개중 좀 오버스러운 것들도 있지 않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심적으로 취약해진 상태에서는 현실성을 가늠해서 고민할 여력도 없다. 그저 내게 처해진 이 상황이 전부 무섭고, 힘들고, 괴로울 뿐이다. 만약 지금 똑같은 일을 겪으면, 힘들긴 하겠지만 '그래. X 돼봐라 이 새끼야. 내 모든 시간, 재력, 인맥을 동원해서 너 하나는 박살 내고 이 세상 뜬다'라는 생각으로 저 인간 하나는 이 악물고 조질 것 같다. 근데 당시에는, 어려서 경험이 없으니 사건의 여파에 대해 짐작이 가질 않고, 모아둔 돈이 없으니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으며, 심적으로 취약해져 한없이 두려웠다.
신고 후,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나의 가슴속엔 항상 큰 바위가 얹어진 것처럼 답답했다. 성추행과 철수팀장의 적반하장 태도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몸은 항상 긴장이 되어있었고, 입맛이 없어 밥도 제대로 못 먹어 몇 주 만에 4kg이 빠졌었다. 맨 정신으로 견디기 힘들어서 집에 가면 항상 술을 마셨다. 내 돈 주고 처음으로 담배도 사봤다. 담배 종류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데, 말보로 레드가 제일 세다고 해서 그걸로 샀다. 중학생 때 읽던 인터넷 소설에서나 볼 줄 알았던 말보로 레드를 내 돈 주고 사다니. 에휴. 하면서 어설프게 담배를 피곤했다. 필 줄도 몰랐고 피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하면 내 가슴속에 얹어진 바위가 없어진 기분이 좀 들까, 해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폈다
너무나도 복잡한 일이 많이 있었기에 이 글에 당시 사건을 전부 담기는 어렵지만, 결론만 말하면 결국 나는 중도 포기를 선언했다. 그 사람 신고하다가 내가 힘들어서 먼저 말라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팀 팀장님 앞에서, 이제 그만두려고 한다고 얘기드렸을 때, 팀장님은 개인사를 공유해 주시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셨다. 그게 감사하기도 하고, 결국 처벌은 못했지만 어쨌건 이 힘든 여정도 끝났구나.. 싶어서 홀가분했다. 그리고 복합적인 감정에, 팀장님과 나만 있는 회의실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회의실에서 나오면서 결심했다. 미친놈이 도사리는 사회에서, 최소한 나를 지키는 정도의 미친년은 되어야겠다고. 가급적 좋은 건 좋게 넘어가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나를 지킬 수 있는 방안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래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