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말로 끼를 부리기 시작해. 말로 사람 시선 모으는 데 재미 붙이기 시작하면 막차 탄 거야. 내가 하는 말 중에 쓸데 있는 말이 하나라도 있는 줄 알아. 없어, 하나도. 그러니까 넌, 절대 그 지점을 안 넘었으면 좋겠다. 정도를 걸을 자신이 없어서 샛길로 빠졌다는 느낌이야. 너무 멀리 샛길로 빠져서 이제 돌아갈 엄두도 안 나. 나는 니가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서 좋아. 그래서 한마디 한마디가 다 귀해."
-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중 현아의 대사 -
<파리의 연인>, <도깨비>, <상속자들> 등 수많은 히트작을 보유한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보면 등장인물들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설렘이 있고, 유머가 있고, 깊은 원한이 있고, 뜨거운 사랑이 있다. 끼로 가득하다. 듣는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 반면 박해영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대사를 마치 봇짐처럼 가슴속에서 툭 꺼내 놓는다. 그동안 들고 있느라 힘들었다는 듯이. 줄거리와 문맥에 어우러져 가슴을 울리는 대사는 많아도 가벼운 유행어로 쓰일 만한 대사는 없다. 그래서 박해영 작가의 대사들은 평소의 진중한 생각들을 시간을 들여 갈고 닦아서 잘 포장해 두었다가 캐릭터의 입을 빌어 덤덤한 척 오다가 주웠어, 하면서 던져 주는 느낌이다.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이거나.
말 좀 한다, 글 좀 쓴다는 치들--박해영 작가 같은 소수의 예외 케이스를 제외한--이 갖는 공통점이 있다면 '말로 끼를 부린다'가 아닐까. 그들의 말과 글을 촘촘한 체로 걸러내면 남는 것이란 나 이만큼 알아, 나 이만큼 세련됐어, 나 이만큼 재주 좋아, 나 이만큼 공감능력 쩔어, 나 이만큼 생각 깊어, 그러니까 난 잘났어, 라고 썼던 검은 연필가루뿐이다. 거기엔 아무런 '정도'도 '진실'도 없다.
이해는 한다. 말로 끼를 부리자면 세상에 옳고 그른 것이 명확하고 진실이 딱 하나만 있다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닐 테니까. 진실이 크게 부각되면 내가 돋보일 여지가 사라지니까. 스스로의 심장을 향해 칼날 같은 예리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군살 없는 정직한 대답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충실하면 끼를 부릴 여지가 사라지니까.
그래서 마치 유명인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사기꾼마냥 누구나 알 만한 유명인의 어록을 끌어오고, 낱말들마다 문학가 같은 현란한 형용사를 덧대고, 비평가들이나 쓰는 쓸데없이 어려운 단어들을 들먹이게 되는 것을 이해는 한다. 들통나면 큰일날 비밀들을 정밀하게 필터링한 호소력 있는 일화들을 약방의 감초처럼, 어물전의 꼴뚜기처럼 빼먹지 않는 것도 이해한다. 그런 재료들로는 끼를 부리기가 매우 수월하니까. 최대한 끼를 부려서 한 사람이라도 더 홀려야 하니까. 그렇게 해서 끼 부리는 사람과 그 끼에 홀린 사람들이 다 같이 막차 타고 절벽으로 달려가는 일은, 아마도 하늘과 땅이 생긴 이래 이 땅에서 가장 많이 일어난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일에 속한다.
순도 높은 '정도'와 '진실'이 담겨 있는 말과 글은 대중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거의 언제나 내가 잘못 알았구나, 잘못 살았구나, 내가 죄인이구나, 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평화와 사랑과 희망과 영원을 바라보게 한다. 그런 이유로 정도와 진실은 항상 다수의 대중이 아닌 소수의 사람들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한 사람의 삶이 변하면 그만큼 세상이 바뀐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는 말과 글은 끼 부림 대신 정도와 진실이 담긴 그것들이다.
반면, 끼 부리는 말과 글은 진한 화장을 한 거리의 여자 같다. 위험한 열정, 대책 없는 죄책감, 근거 없는 희망, 굴절된 자의식, 거짓된 친밀감, 가치 없는 것의 우상화로 감정을 자극한다. 술처럼 취하게 해놓고 보이지 않는 곳의 세포에 염증을 일으킨다. 결국 거리의 여자는 손님과 함께 파멸의 길로 향한다.
항상 '정도'와 '진실'을 바라보자. 그래서 말로 끼 부리지도 말고, 끼 부리는 말에 홀리지도 말자. 막차 타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