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최 Feb 26. 2023

지연의 나래

#감응의 글쓰기 21기 15차시 과제_인터뷰

나래는 나와 2007~2008년에 첫 직장 출판사에서 다른 부서로 만났다. 나는 기획실이었고 나래는 편집부였는데, 동갑인데다 같은 망원동에 사는 덕에 퇴사 후 진로가 갈리면서도 술친구로 연이 이어질 수 있었다. 출판계에 계속 머문 나와 무역회사, 강사 등 계속 업종을 바꾸던 나래는 ‘서로 이렇게나 다름’을 관찰하며 30대를 함께 보냈다. 외연이 중요한 나래와 내연이 중요한 나는 이제 서로의 성향을 이해하며 서로의 삶을 아카이브해 주는 소중한 친구다. 40대에 접어들 무렵 나래는 유부녀가 됐고 나는 프리랜서가 됐으며, 우리 관계는 글친구, 공부친구로 시즌 2를 맞았다. 이쯤에서 내가 가장 모르는 그의 유년기와 학창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나래는 어떻게 해서 나래가 되었는지.



유년기에 가장 오래된 기억이나 장면그리고 그 기억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나 느낌은대답할 게 없으면 그냥 패스하면 돼.

미취학 아동일 때의 기억을 말하는 거지?


초등학교 때도 괜찮고.

유치원 때 교회에 딸린 성경 공부하는 데 있잖아. 거기를 다니다 이사 가느라 그만뒀어. 어렸을 때 이사를 되게 많이 했어. 한 15번 했나. 엄마, 아빠가 단칸방에서 시작해서. 초등학교도 세 군데 다녔지. 그러다 초2 때 이사하고 전학 와서 주말에 그 교회 부속원을 다시 간 거야. 그날 선생님이 누구랑 왔냐고 묻는데 나 혼자 왔다 그러니까 당황하시더라고. 선생님이 ‘이 친구 아는 사람?’ 그랬더니,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날 기억하던 우리 반 친구가 ‘우리 반이에요.’ 해서 그 친구랑 5학년까지 같이 교회 생활하면서 엄청 친했지. 나중에 생각하니 초등 2학년 애가 거길 혼자 갔다는 게 너무 신기하더라. 누가 데려다줄 법도 한데.


어릴 때부터 혼자 잘 다녔구먼.

그런 것 같아. 5분, 10분 거리라도 차도도 있고 해서 그 나이 땐 보통 누가 데려다주잖아. 근데 난 누구 손잡고 다닌 기억이 없네.

5학년 때 전학 가기 전까지 매주 주말은 교회가 나의 중요한 소셜 활동이었어. 여름성경학교 이런 거 다 갔단 말이야. 성가대도 하고, 성탄절 연극 때 마굿간의 말 역할 맡아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네. 구주 오셨네.’ 이런 대사도 하고, 나중엔 비중이 커져서 제사장 역할도 하고, 어른 예배에서 공연도 하고. 너무 즐거웠어. 종교라기보다는 커뮤니티 놀이였던 것 같아.


그때 동생이 몇 살이었어?

나랑 6살 차이 나니까 2살. 아기였네. 아빠는 일하느라 바쁘고 엄마는 애기 보고 살림하고 아빠 일 돕느라 바빴지. 아빠가 풀무원 대리점 하고 그럴 때.


전형적인 맞벌이 가정의 풍경이었겠네결핍은 없었어?

아니. 나는 낯선 거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전학 다니는 것도 되게 좋아했어.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선생님 누굴까 궁금해하고 그랬으니까. 엄마, 아빠가 나는 키우기 편했다 그랬어. 건강도 하고 손 댈 게 없다고. 집에 붙어 있질 않았으니까. 아침 먹고 나가서 점심, 저녁까지 먹고 들어오니까 엄마가 제발 저녁은 먹고 들어오지 말라고, 폐 끼친다고. 잘 나갔다 잘 들어오고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하는 스타일이었지. 비밀이 없는 스타일? 집에 있으면 얼굴이 노래지는 아이랬어. 시험 본 날은 골목 초입에서부터 ‘나 한 개 틀렸어!’ 하면서 뛰어왔대. 그럼 엄마가 ‘집에 와서 얘기해.’ 하고.


엄마는 얘기 잘 들어줬어?

잘 들어줬는데 동생도 보고 해야 하니까 내 성에 차진 않았지.


동생이랑 관계는 어땠어?

동생 귀엽고 되게 좋아했어. 잘 돌봤는지는 모르겠는데 버리고 다니지는 않았어. 세심하게 챙겨 주진 못했던 것 같아. 내가 6학년 때 동생이 유치원생이었나 그랬는데 둘이 다니다 얘가 오줌 마렵다고 했어. 급하면 바지를 내려서 오줌을 뉘어야 하는데 난 그게 창피하니까 최대한 빨리 집에 가는 방법을 택했지. 그러다 동생이 못 참고 중간에 싸고. 그래도 목욕 같이 가면 내가 옷 입히고 그랬어. 그럼 주변 어른들이 나를 되게 칭찬해 줬어. 시켜서 하긴 했는데 그 칭찬이 되게 달콤했지.


나래는 에너지가 높고 활동적이고 계획과 목표를 추구하는 성향인데그러한 성향을 언제 처음 자각했어?

중학교 때 중간고사, 기말고사 볼 때 나보다 점수 잘 나온 친구가 하는 거 보고 계획 세워서 실행하는 습관이 생겼어. 걔가 책을 다 외우길래 나도 책을 다 외워야겠다, 계획을 세워 보자. 어차피 범위는 나와 있고 시험 한 3~4주 전에 전 과목 계획표를 세워서 실행하고 시험을 봤지. 시험 때문에 생긴 거야. 그런데 내가 이런 성향이구나 자각한 건 아니고 다들 그렇게 하는 줄 알았지.

그땐 내가 에너지가 높다는 인식을 못 했고 그렇게 활동적이지도 않았어. 제일 싫어했던 게 체육 시간이었으니까. 5학년 때 전학 온 뒤부터 왜인지 공부가 타깃이 돼서, 고등학교 때까지 그냥 좋은 성적을 받아야지 하는 생각뿐이었어. 공부로 다른 애들 다 이겨 버리겠다. 전교는 몰라도 반에선 1등해야지. 공부를 잘해야 우월하고 그게 내 가치 증명인 것 같았어. 학원도 엄마, 아빠가 다니라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알아보고 보내 달라고 한 거야.


왜 갑자기 공부가 타깃이 된 거지사교성활동성 높던 애가.

나도 그게 신기해. 4학년, 5학년 때까진 그냥 친구들이랑 고무줄놀이 하고 그러던 앤데.


학창시절 가장 큰 고민이 뭐였어?

1등 못 하면 어떡하지. 성적 떨어지면 어떡하지. 그거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1등하게 해 주세요.’라는 말을 되게 많이 했어, 주술처럼.


스카이 캐슬이냐?

그러니까.


전공을 중국어로 택한 이유는?

수능을 망쳐서 내신 비중이 제일 높은 대학을 고르고 거기서 학과를 택한 거야. 그때 중국통이니 해서 중국어 하면 완전 먹고살 길이 열린다고, 굶어죽을 리가 없다고 그랬거든. 중국어가 굉장히 붐이었어. 원래 명문대가 목표였는데 수능을 망쳐서 인서울 끝자락에 지원했어. 만약 대학 못 가면 공무원 시험 9급이라도 봐서 상쇄하려고 했는데, 대학 붙으니 공부에 손도 대고 싶지 않더라. 학창시절에 그렇게 공부한 것치고 대학 너무 못 간 거 아니냐?


(웃음)

말할수록 글로 완성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든 해 볼게시간을 좀 점프해서지금의 나래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추구하는 삶이 있는 사람으로 보여말하자면 내용과 형식 중에 형식에 몰두하는 스타일내 경우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걸 위해선 그릇이 어떤 모양이라도 상관없는데나래는 원하는 그릇의 형태가 있고 그 안에 내용물은 그때그때 달라져도 되는 유형어떻게 생각해?

난 그 그릇이 그 주변 사람들인 것 같기도 하다. 일보다는 사실 사람들이랑 같이하는 게 너무 좋아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상관이 없었던 것 같아. 강사일 할 때도 그 선생님 그룹이랑 단톡창에서 서로 으쌰으쌰하는 게 좋았던 거고. 나는 뭘 너처럼 뭘 하고 싶다, 그걸 하기만 한다면 상관없다 이게 아니라, 내가 같이 있어서 좋은 사람들과 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지 괜찮다 쪽인 것 같은데. 지금도 마찬가지로 읽고 쓰는 건 혼자서는 못하겠는데 같이하니까 너무 재미있어. 너랑 수업 같이 듣는 것도 새로운 걸 알고 이런 것보다 너랑 나랑 얘기할 거리가 많아지는 게 좋은 거고, 은유 샘 글쓰기에서도 누군가의 글에 대해서 같이 나누고 뭘 쓸지 나누고 이런 게 너무 좋아. 학창시절에도 애들이랑 시험 얘기할 때에도 이 문제 너무 아깝게 틀렸다, 넌 그렇게 틀렸냐, 이런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게 나는 너무 즐거웠던 것 같아. 난 결코 혼자 못 살 스타일이다.


그러면 그 그릇을 계속 유지할 수가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있어?

아니. 새로운 사람들 만나면 되잖아. 떠나간 인연은 시절 인연이니 하고 쿨하게 받아들이는데, 다만 지금 인연은 좀 길게 갔으면 하는 건 있어. 그리고 지금은 집에 내 사람(남편)이 있잖아. 고정불변의 상수가 있으니까 다른 것들은 변수로서 받아들이고 집착하지 않게 된 것 같다.


내 생각엔 유년기 그 교회학교 다닐 때가 너의 본성이었던 것 같아사람 좋아하고 무대 체질.

내 생각에도 그래. 중고등학교 때는 펼칠 무대가 많지 않았어.


마지막으로 나래에게 목표?

지금은 그다지 만들고 싶지 않은 거.     



나래의 그릇은 주변 사람들이다. 사람들과 같이한다면 무엇을 하든 내용은 상관없다는 그녀는 여러 직업, 여러 직장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 명제를 찾아냈다. 어린 시절 전학 다니는 일이 즐거웠다는 나래는 두려움 없이 변화를 받아들이며 스스로도 변화를 꾀하는 기질이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빛이 나는 사람이다. 20~30대의 나래는 ‘무대와 관객’을 필요로 해 왔고, 40대로 걸어 들어가는 지금 그것은 ‘회합의 장’이란 단어로 치환된다.


겁 없이 용감하게 부딪치며 자신의 삶의 양식을 다듬어 온 나래. 외향적 성향이 충족되지 않으면 속이 곪아드는 탓에 끊임없이 외부로 나아가야 했던 나래. 그래서 세상이 종말해도 마지막까지 결혼만은 안 할 것 같던 그녀였지만, 결혼 이후 평생 그녀를 괴롭히던 고독과 방랑이 일시에 해결되었다. 의외성을 사랑하는 나래다운 궤적. 지켜보던 내겐 그것이 삶의 예측 불가성을 대표하는 사례가 되었다.


태양을 도는 행성들처럼 고정불변의 중력 덕에 더욱 자유로워진 나래의 비행을 응원하고 또 기대한다. 나도 오랫동안 그녀의 그릇이 되어 시즌 3, 4까지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며.     

작가의 이전글 그때 난 어쩌다 약자가 되었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