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의 글쓰기 21기 13차시 과제
20대 기간 내내 나의 애증이었다가 30대에 접어들며 관계를 종료한 T. 그에 대한 애정을 처음 의식하던 2006년 6월의 기록을 퇴고한다. T의 군복무 시절 두 번째 휴가 때 만나고 와서 썼던 글을 통해 애정 관계에서 약자 위치로 접고 들어가던 스물넷의 나를 바라본다.
입대를 앞두었을 때 연애 중이라는 T의 고백을 들었다. 당시에는 별 감응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난 그 여자를 그저 단기성이라 여기며 음모를 품고 있었다. T는 그 여자를 만나면 차오르는 욕망을 누르는 게 힘들다며 욕구불만을 토로했는데, 그 욕구를 내가 충족시켜 준다면 그녀에게서 T를 언제든 앗아올 수 있다고 자신했다. T에 관해 난 언제나 여유로웠다.
T가 입대를 하고서 편지를 주고받다 두 번째 휴가 때 만났다. 곧 휴가 나간단 전화를 받을 때부터 난 T와 자게 될지 아닐지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살이 좀 쪘다면, 그리고 술이 좀 취한다면 잘 수도 있겠거니 염두에 두는 사이 T가 휴가를 나와 전화를 했다. 신촌에서 만난 T는 그가 맞나 긴가민가할 정도로 키가 훌쩍 커져 있었다. 깡마른 팔로 내가 사준 치킨을 허겁지겁 먹던 예전의 소년은 벗어버린, 남성이었다. 우린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적게 마셔도 늘 몽롱해지던 락카페를 찾아 맥주를 들이켰다. 10시쯤엔 오뎅바로 이동해 정종과 소주를 마셨다. 며칠 내내 빈속이었던 난 변변한 안주도 없이 마신 술로 초토화되었고, T의 이끌림에 모텔비를 긁고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일이 생길까 말까 저울질하다 취기로 눈을 감아버렸을 때 T가 날 안으며 키스했다. 내 위에 올라오는 T를 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다가 두어 번 “여자친구는?” 하고 물었다. T는 “여자친구가 뭐?” 하고 반문하며 내 입을 막았고, 그 이상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동등한 관계라 생각됐다. 둘의 욕구가 교차되던 순간 서로의 옆에 서로가 있었을 뿐. 그저 우연한 사고 내지는 정해져 있던 사건이라 여겼다. 둘 사이엔 우열도 없었고 요구도 없었다.
T의 애무는 짧았다. 아랫도리가 벗겨졌을 때 난 콘돔을 요구하며 T를 카운터에 다녀오게 했다. T는 다시 침대로 와 전희를 시작했고, 왠지 내겐 오르가즘 따윈 기미도 없이 질의 통증만 느껴졌다. 아픈 건 전초전일 거라 생각하며 10분여를 순수한 고통으로 신음을 뱉었다. 통증의 크기와 질감은 계속 똑같았고 쾌감도 끝내 없었으며 T의 페니스는 자꾸 빠져 헛돌았다. 결국 그는 배려 어린, 그러나 실패한 말투로 “그렇게 아파?” 하고선 잠시 자리를 떠났다. 난 대답 없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꼼짝하지 않았다.
이불로 몸을 감고 침대 귀퉁이에 앉아 담뱃불을 켜자 T가 내 옆에 와 앉았다. 난 T에게 물었다. “내가 아직 극복이 안 된 거야,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야?” 질문하면서도 난 이미 그거나 그거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T는 제3의 대답을 했다. “그냥 너랑 나랑 맞지 않는 거야.”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 그 대답 때문에 난 내가 만난 남자 중 T보다 착한 남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저 위로치레겠지. 난 울고 싶어져서 서글픈 감정에 작위를 더해 눈물을 흘렸다. T는 내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담배를 끄고 T와 난 다시 누웠다. T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포즈로 날 꼭 안았다. 어떠한 체취도 없는 T의 살결이 마냥 푸근했다. 나 역시 T의 허리에 팔을 감아 마주 안았다. 똬리처럼 서로의 몸이 꽁꽁 엉켜 숨이 막혔다. 역시나 그는 “숨 막혀?” 하는 물음을 잊지 않았다. 긍정할 자신이 없던 난 애꿎은 담배만 다시 태우고 누웠다. T는 다시 팔과 다리로 내 몸을 감싸 안았고 우린 그 상태로 잠이 들었다.
물소리에 잠이 깼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T가 욕실에서 샤워 중이었다. 내가 아직 자고 있을 때 T는 홀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침대 밑이나 베개맡에 구겨진 옷들을 찾아 입으며 다신 느끼고 싶지 않은 지독한 고독을 느꼈다. 전날의 과음으로 두통이 심했고 졸음도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으며 몸도 잔뜩 무거웠다. 그런 상태로 아무 도움도 없이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는 기분. 옷을 다 입기 전에 T가 나와 주길 바랐지만 T는 과음의 후유증도 없는지, 혹은 요만큼의 내 체취마저도 모두 씻어내고 있는 것인지 꽤 오랜 후에 나왔다. 아니, 오래라고 느낀 건 내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T는 옷을 다 차려 입고 나왔다. T처럼 오랫동안 청결하게 샤워할 정신 상태를 갖추지 못한 난 대충 팔다리와 얼굴만 씻고 칫솔이 없어 물로 입을 헹궜다. 찝찝한 구강 때문에 방을 나가기 전 마지막 키스도 요청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시험이 될 터인데, 그지없이 안타까웠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몸도 힘겹게 가누는 내게 T는 티백을 담근 녹차를 건넸다. 한입 마시고 줄 줄 알았던 그가 온전히 건네준 컵이 따뜻했다. 온전히 나 마시라고 타 놓은 건가. 난 감동을 느낄 여유도 정신도 없이 토끼가 샘물 마시듯 입술만 적시고 내려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T가 내게 착하게 굴어 주었던 것에 비해 난 배려가 없었다.
통화하는 T를 난 침대에 누워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창문을 열어 내다보며 어딘가를 두리번거리는 T에게서, 이미 그는 나와 관계없는 다른 곳으로 출발한 후임을 깨달았다. 함께 잠을 잔 남자의 뒷모습을 본다는 건 끔찍했다. 더구나 섹스는 실패였고, 녹다운된 나와 말끔한 T의 대비는 더욱 그랬다. 요구가 생기면 안 되는 게 우리 사이인데, 서로를 침범하려는 욕심이 생기면 안 되는 게 T와 나의 관계인데, 그 거리가 그와 나를 유지시켜 주는 것인데, 난 자꾸만 T와 통화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겁이 나서 묻진 않았다.
시계를 보니 9시가 되지 않은 시각. 체크아웃은 12시까지 해도 될 터인데 T는 맥없이 누워있는 내게 “나갈래?” 하고 제안했다. “응.” 난 곧바로 대답하곤 일어나 화장대 앞에 서서 머리를 빗었다. 아무리 빗어도 헝클어져있는 머리. 길을 가다 이 머리를 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처참해지는 기분을 숨기고 머리를 연거푸 빗으며 애써 정돈이 다 된 척 샌들을 신고 방을 나왔다.
우리가 묵은 방은 6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문득 T에게 미안해졌다. 그를 충족시켜 주지도 못할 거면서 도도하게 “콘돔 없으면 안 해.” 하고 차갑게 돌아누워 헛수고를 시킨 게 미안해서 죽고 싶었다.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우린 길을 걸었다. T가 중간에 “난 여기서 타는데.” 하고 버스정류장을 가리켰지만 난 “응.” 하고 계속 걸었다. T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가뜩이나 좋지 않은 위의 상태가 최악에 달해 난 걷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지하도로 내려가려 방향을 틀었을 때 기어코 T가 먼저 입을 열어 안녕을 고했다. 난 미소 하나 달랑 던지며 손을 흔들어 주고 내려왔다. 이것으로 내 냉정했던 태도에 대한 오해가 풀릴 거라 기대할 순 없었다.
지하도를 건너 버스정류장에 다다르기까지,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기까지, 집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후에도 난 고립된 사람처럼 외로웠다. 자꾸만 걷잡을 수 없이 욕심이 생겼다. 내겐 그녀에게서 T를 빼앗아올 자격이 없었다. 언제든 T를 강탈할 수 있다고 믿던 여유도 근거가 없었다. 섹스에 성공했더라면, 그 뒤에 T의 따뜻한 면모가 바로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이란 걸 인지했더라면, 난 당당히 아침에 T를 껴안고 그녀를 버리라는 요구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없다. 그건 애초부터 없었고, 있었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다.
난 다시금 작년 여름을 탓한다. 가장 받아들이고 싶었던 T에게 열리지 않았던 이유. 섹스를 거부하는 내 몸이 지닌 기억. 이토록 불일치한 몸과 마음의 표리부동을 내가 달리 어디에 물어야 할까. 다시 남자에게, T에게 안기고 싶은 욕망을 그저 가두고 묻고 끌어안고만 있으라고 다그치는 내 육체.
친구 서녕은 T를 만나지 말라고 한다. 애인이 있는 그에게 목매지 말고 새로운 사람과 시작하라고. 하지만 난 T가 필요하다. T여야만 한다. 내게 T는 위태와 불안의 징조마냥 절실함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한쪽에서 욕심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우위가 생겼으며 내 위치는 T의 아래가 되었다. 자존심과 절실함을 저울에 올려놓고 눈금의 흔들림이 멈추기도 전에 난 이미 자존심의 범위를 확장하며 타협을 시도한다.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최우선으로 작용하는 마음의 갈피. 난 T의 발끝자락을 애처롭게 부여잡고 있다. T가 모르게. 알아도 모르는 척하게. 그것조차도 모르는 척하며 능청떨고 있다.
10개월 만에 본 T에게 “나 이제 많이 컸다.”라고 해놓았는데, 그에게 너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만만한 녀석이었던 T가 하루아침에 내 구원자로 격상해 버린 당황스러운 시기. 아마 그건 ‘갖고 싶다. 미치도록 갖고 싶다. 왜냐.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심리의 정석이 아니었을까. 난 작은 친절에도 예민하게 고마움과 배려를 느끼며 T를 한껏 떠받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할 법한 환상을 T에게 덮어씌웠다. 아마도 T는 날 만날 때면 자신이 뭐라도 된 듯 들떴을 것이다.
T는 학생이고 난 직장인이란 핑계로 난 점점 만남의 비용을 내가 치렀다. 자신의 우위를 감지하고 익숙해지던 T. 상냥하던 그는 점차 조심하지 않고 무례해졌고, 서슴없이 상처 주는 말을 했다. 그땐 T를 원망했지만 그렇게 드러나지 않았다면 T의 밑바닥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T는 나의 동아줄이었다. 스물둘에 흑화되어 무의미에 빠져 있던 난 T를 붙잡고 올라가며 세계를 다시 긍정할 힘을 얻었다. 아니, 세계를 다시 긍정할 힘을 얻기 위해 내 무의식이 T를 택했다. 회복되고 나니 비로소 그의 위상이 똑바로 보였다. T는 내 위에 있지 않았고 우린 다시 동등해졌다. T는 아마도 불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자존을 해치며 다시 아래로 떨어트려 자신의 우위를 되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나도 강해져 있었고, 내 안에 공격성을 발휘해 그를 후려쳤다. “넌 왜 나 만날 때 돈을 안 써?” 예전 같으면 내 입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던 말. T는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T는 어리석고 무례했지만 그 어리석음과 무례함이 날 깨우고 살려냈으니 그 시절 내가 살아남은 건 누가 뭐래도 T 덕분이다. 난 T에게 줄 수 있는 걸 다 주었기에 한 점의 후회도 없지만, T는 이듬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계속 내게 문자를 보내며 미련을 표시했다. 그 문자를 읽씹하고 삭제해 버리던 희열과 승리감마저 선사해 주었으니 T는 진정한 의미로든 비꼬는 의미로든 내 은인이다. 이제 건강밖에 빌 게 없어진 그의 안부. 어디서든 너도 잘 살아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