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최 Jan 14. 2023

LOSER OR LOVER

#감응의 글쓰기 21기 11차시 과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노랫말에 끝내 동의할 수 없었던 너는 교회에 발붙이지 못하고 나와 버렸다. 그때가 11살,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절이 싫은 중이 떠나듯 네 속지를 포기하고 나와 버리는 것. 그게 앞으로 평생 반복하게 될 떠돌이 운명이 될 줄은 그땐 몰랐겠지.


자라면서 넌 네게 달려드는 세상만사를 하나하나 요목조목 뜯어보곤 ‘납득이 안 돼, 납득이.’ 투덜대며 울타리 밖으로 걷어차 버렸다. 너는 구봉산 구름 위 정상석에 새겨진 해발고도 표시처럼 높고 험준하고 또렷한 것만 납득하려 했다. 네 20대는 네 청춘의 기념비였던 절친들을 솎아내던 스토리다. 넌 늘 너무 많이 쳐들어와서라고 이유를 들었다. 네겐 타자에 대한 자비와 관대함이 없다. 마음에 사랑이 없다. 당최 네 기준에 살아남을 납득이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아마 너 자신도 구봉산 자락마저 디디지 못할 것이다.


네 이력을 보라. 출판 사관학교 같았던 첫 직장에선 온갖 일 다 견뎌 놓고 막판에 상사와의 불화로 나왔지. 동료들이 너무 좋아서 나올 생각이 없었던 2번째 직장은 망해서 어쩔 수 없이 나왔다 치자. 인생 보스를 만났던 3번째 직장에선 입사 이후 계속되는 연봉 동결과 밀리는 월급을 못 버티고 나왔지. 4번째 직장에선 기획편집자 초자아가 발동해 일은 신나게 하면서 상사가 주던 상처들을 꾹꾹 눌러 담아 놨다 퇴사로 복수하고 나왔지. 그냥저냥 다니러 들어갔던 5번째 직장에선 시행착오란 시행착오는 다 겪어 놓고 그저 구조 조정하려고 모욕 주던 상사의 의도대로 퇴사해 주었지. 편집자 초자아가 다시 발동했던 6번째 직장에서는 씨 뿌리고 물주고 거름 주고 지지고 볶는 지리멸렬은 다 견뎌 놓고 수확 도중에 알력싸움 좀 밀린다고 에이씨 못해먹겠네 박수도 못 받으며 나왔지. 마지막 직장은 공황 때문에 나왔지만 결국 그 세월의 누적 아니었겠니.


네게서 다 올라와 놓고 마지막 피크를 못 넘는 유약한 인내심의 패턴이 보인다. 1,002미터 고도의 구봉산을 800미터, 900미터까지 꾸역꾸역 올라가 놓곤 초등학교 운동장 한 바퀴도 안 되는 고 봉우리 앞에서 멘탈이 터져 너는 산을 떠나 버린다. 물론 직장생활이 구봉산처럼 곳곳에 표지판이 있어서 해발고도랄지 현재 위치랄지 얼마나 남았는지 같은 걸 알 순 없다만.


네 마음에 사랑이 있었다면, 그래서 타인과 세상을 좀 더 너그럽고 관대하게 바라보았더라면, 그래서 도저히 납득되지 않은 것들도 네 울타리 안에 품고 그냥 머물게 좀 두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넌 회사 안의 불균형과 부조리도 피크를 찍고 전환되는 국면이 온다는 것, 네가 운행하던 인내의 열차는 종점에 다다라서야 열매를 싣고 돌아온다는 것, 산세를 보며 해발고도와 네 현재 위치를 유추하고 봉우리 넘는 법을 익혔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넌 여전히 소속을 가지고 이름 뒤에 직급을 말하고, 명함을 내밀고, 법카를 긁고, 연말정산을 하고, 퇴직금 통장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 것이다. 네가 지금 회사 밖에 있는 이유는 다 마음에 사랑이 없어서다.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뭐든지 열심이던 넌 어릴 적 교회에 다닐 때에도 그냥 예배만 드리진 않았다. 교회 대표로 성경고사 대회에 나가 상을 타오고 성가대에 자원해 일요일마다 가운을 입고 노래하곤 했지. 그러나 일찍이 생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 네게 교회는 답이 될 수 없었다. 신앙에 의지하기엔 너는 존재들을 너무 사랑했고, 그것들을 신을 우회하지 않고 직접 사랑하길 원했다. 여름에 들끓던 송충이도, 밤에 우는 풀벌레도, 학교의 등나무도, 놀이터의 모래알도 말이다.


가슴속에 쉴 새 없이 샘솟는 사랑이 들끓던 넌 몸이 터져 버리기 전에 그것을 소진하기 위해 늘 무언가를 좋아했다.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서태지를 쫓아다녔다. 펜팔을 사귀고, 예쁜 펜과 스티커를 사고, PC통신 동호회 언니, 오빠 들에게 전화해 투정부리고, 허구한 날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한 치의 곁을 내어주면 두 치를 파고드는 친구들을 환대했다. 그럼 친구들은 다시 네 치를 치고 들어왔다. 서로 엉키고 섞이고 휘말려들며 한 덩어리가 되기 위해 돌진하던, 세상에 친구가 전부이던 시기. 어떤 건 모래처럼 손에서 빠져나가고 어떤 건 그대로 있고 또 어떤 건 단단하게 굳는 걸 보며 너는 배웠으리라. 사랑을 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견뎌야 할 것과 견디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그래야 마르지 않고 계속 샘솟을 수 있다는 것을.


그 덕에 넌 스스로를 지켜왔다. 표지판도 없는 직장생활에서도 자기애를 위협하는 경고문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던 넌 사랑할 수 있는 일은 취하고 사랑할 수 없는 영역에선 피신했다. 때론 본능적으로, 때론 전략적으로 일을 매듭지으면서 위협을 피할 시점을 찾아냈다. 수압을 견디며 내려가다가도 한계 수심을 감지하면 그 아래 뭐가 있든 미련 없이 돌아 나오듯 말이다. 한계 수심을 기어이 넘어서려 할 땐 약하기만 해 보였던 신체가 나서서 공황 경보를 울리며 널 그곳에서 끄집어냈다. 네 모든 메커니즘이 총동원되어 너를 구출했다.


넌 이따금 발동하는 직업적 자아나 소속감을 즐기곤 했지만 한 번도 조직이나 사회적 자아에 매몰된 적이 없었다. 애초에 네가 사랑하고자 했던 그 존재들처럼 언제나 자유로운 자연인이었다. 네 안에선 여전히 사랑이 화수분처럼 샘솟는다. 넌 여전히 이 세계를 사랑한다. 여름날의 매미도, 새벽의 귀뚜라미 소리도, 주차장의 길고양이도, 강변북로에 지는 노을도, 잘생긴 아이돌 스타도, 글을 쓰는 것도, 개구쟁이 조카도, 친구와 가족과 네 곁을 지키는 모두를.

작가의 이전글 길에서 쫓아와서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