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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최 Apr 25. 2023

우량아는 자라서

#평비 시즌1 6차시 과제

날씬함을 위한 선결 조건인 통제된 식욕은 아름다움, 욕망의 대상이 될 자격, 가치 있음을 함축한다. 통제되지 않은 식욕―뚱뚱한 여성―이 함축하는 바는 그 반대여서, 뚱뚱한 여자는 추하고 역겨우며 근본적으로 무가치하게 취급된다. - 『욕구들』 1장 중     


난 3.8킬로그램의 우량아로 태어나 엄마 젖을 엄청 먹고 자랐다. 초등학교 때까지 훌쩍한 체형이었다가 중학교 때부터 옆으로 살이 찌기 시작했다. 먹고 싶으면 검열 없이 먹고 싶다 발화하던 나는 본래 뚱뚱한 몸이 본체이다.


고3 때 다니던 노량진 한샘학원 강의실은 최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책걸상 사이즈가 무척 작았다. 1인분의 공간도 협소하거니와 자리에 드나들려면 옆자리 학생이 숨을 참으며 의자를 당겨 지나갈 공간을 만들어 줘야 했다. 난 뚱뚱한 아이였는데, 비좁은 틈을 지나가려면 옆자리 학생이 의자를 두어 번은 당겨 줘야 했다. 그중 첫 번째는 사실 당기는 시늉이고, 두 번, 세 번째에야 실질적인 통로가 완성되었다. 그는 여러 번에 걸쳐 틈을 벌려 줌으로써 내게 전하려 했다. ‘이래도 못 지나가? 네가 뚱뚱해서 나한테 얼마나 피해를 끼치는지 알겠어?’

모두가 균일하게 작은 사이즈를 점유하는 환경에서, 할당된 사이즈를 넘어서는 개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한다. 시공간이 비용으로 환산되는 자본주의와,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권리를 얻는 개인주의의 톱니바퀴 속에서, 뚱뚱한 개인은 존재 자체로 같은 비용을 치른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다. 뚱뚱함이 민폐가 되는 일상의 순간 그것은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가치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뚱뚱함이 악이 되면 그에 대한 미추의 판단도 결이 달라진다. 호불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죄악이기 때문에 추하고 역겨워지는 것이다. 이 구조에서 사람들은 안심하고 비난할 수 있다. 뚱뚱한 개인을, 단지 뚱뚱하다는 사실만으로, 윤리적, 미적 측면에서 모조리 말이다.     


“뚱뚱한 승객 2명 사이 끼어 땀 묻고 불편…비만이면 비행기 타지 마라” (위키트리 2022. 10. 20)

옆자리 비만 승객땜에 골반 틀어졌다며 보상 요구하는 남자 (국민일보 2018. 11. 18)

혼자서 두 자리 차지하는 비만인 어쩌나… 항공사는 고민 중 (헤럴드경제 2016. 09. 24)     


종종 항공기 비만 승객 피해 사례가 뜬다. 비만 승객은 항공사의 오랜 골칫거리다. 그 사회의 권력 구도는 사건을 바라보는 대중이 누구에게 감정이입하고 누굴 타자화하느냐를 통해 드러난다. 대다수는 옆자리에서 불편을 겪은 승객의 분노에 이입해 비만 승객을 비난한다. 비만인 혐오를 지적하는 일부도 피해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못한다. 항공사는 비만 승객에게 두 좌석을 구매하도록 유도하지만 몇 나라에서 이는 차별이고 위법이라 판결된 바 있다. 항공사들은 비만 승객의 ‘민폐’를 일단 방치한 뒤 사후에 피해 승객이 항의하면 푼돈으로 보상하며 ‘우리는 비만 승객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표어를 내건다. 실은 비행기에 체형별로 다양한 사이즈의 좌석을 구비하지 않는 것이 차별이다. 그러나 부피와 무게가 곧 비용인 비행기에서 1인분의 좌석이 커지긴 요원해 보인다. 그 와중에 이코노미클래스는 평균 체형의 사람들에게도 ‘이코노미클래스증후군’이라 불리는 심부정맥혈전증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비좁다. 인구 과밀 시대, 시공간이 비용으로 환산되는 자본주의에서 권력은 공간을 적게 차지하는 자, 협소하고 비좁은 틈마저 여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신체로 향한다.


나는 20대에 들어 마른 몸을 영접했다. 어느 시기에 살이 저절로 쭉쭉쭉쭉 빠지기 시작했고, 살이 빠진다는 걸 깨닫자 모든 신경이 합세해 42킬로그램에 도달했다. 더 이상 “맛있겠다”를 자동발화하지 않는, 먹지 않아도 충분하고 먹지 않는 걸 선택하는 여자가 되었다. 책걸상의 좁은 틈을 무리 없이 지나갈 수 있게 되자 세상은 내게 한결 친절해졌다. 길 가다 하수구로 열쇠를 떨어뜨리자 군말 없이 “해 줄게, 해 줄게!” 하며 더러운 덮개를 열고 몸을 밀어 넣어 꺼내 주던 남사친. 뚱뚱한 나라면 한마디라도 들었을 볼멘소리가 일절 없는 적극적인 친절. 강의 시간에 여학생들의 다리를 훔쳐보는 교수님은 내게 “미라가 아주 품위 있어졌어.” 하며 흡족해했다. 난 그들이 우대하는 ‘여자’의 범위에 들어와 있었다.


익숙한 척하며 즐겼다. 미소 띤 “고마워.”만 돌려주면 그들은 충분해했다. 그 친절과 호의를, 그로부터 내 기질적인 내향성과 진지함이 고고한 품위로 탈바꿈되는 신비를, 주변 사람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우월감을 잃고 싶지 않았다. 예의 ‘그’ 뚱뚱한 몸이 아니라 ‘이’ 마른 몸이 진짜 나라고 모두가 납득하길 바랐다. 그래서 겉으론 고양이처럼 가만히 있으면서 속으론 칼로리와 멱살잡이를 했다. 종일 녹차병을 손에 달고 음식 대신 마시고 또 마셨다. 몸속이 텅 비어 식도부터 창자까지 꼬르륵 소리가 기다랗게 타고 내려갈 때면 그것이 내가 통치하는 광활한 영토처럼 느껴졌다. 어느 자리든 테이블과 접시 위에 숫자가 둥둥 떠다녔고, 밤이면 10킬로칼로리도 안 되는 곤약 한 덩이를 굴소스에 조려 먹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민했다. 술자리에서 먼 테이블로 팔을 뻗어 음식을 가져오는 이들을 보며 난 저렇게까지 먹으려 노력하지 않는 사람임을 상기했다. 한 켠에선 그가 아무렇지 않게 먹는 음식을 사악한 인격체인 양 흘겨봤다. 하염없이 먹고 싶은 식욕을 너무 잘 알기에 더더욱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그것과 살짝 눈만 마주쳐도 내 몸이 미친 소처럼 그것을 따라 광란의 질주를 해 버릴 것 같았다.


얼마 전 걸그룹 트와이스의 정연이 비만 체형으로 무대에 서자 사람들은 기겁해서 검색을 해 댔다. 원인은 디스크 치료제 부작용이었다. 그제서 사람들은 안심하고 정연의 회복을 바라며 믿고 기다린다는 응원을 보냈다. ‘믿고 기다린다’는 말에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정연이 배회하는 곳은 어디이고 이들이 기다리는 곳은 어디일까. 뚱뚱함에 그냥은 없다. 왕성한 식욕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비극적인 서사를 가진 변명이 필요하다.


20대 중반의 ‘젊고 마른 몸’은 이후 10여 년간 몇 번의 광란의 질주를 하고서 머물 곳을 찾은 듯 보인다. 몸이 통제 불능으로 치달을 때 느낀 어마어마한 공포, 세상이 다시 나에게 각박해질 거란 두려움 또한 이 몸에 저장돼 있다. ‘젊고 마른 몸’에서 젊음은 지나가고 BMI 정상체중이 남았다. 특별한 질환이나 부작용을 앓지 않고, 출산, 육아 같은 육체의 사회적 헌신을 반납해 버린 내 몸은 더욱 궁색하게 느껴진다. 사회에서 나의 신체는 여전히 기능성보다 시연성의 차원에 더 많이 머물 것이다. 이제 나의 정상체중은 세상의 친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례를 당하지 않기 위해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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