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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최 Jun 13. 2023

C의 대나무숲

#굉음 에세이 - 첫사랑

첫사랑을 질문 받으면 길 잃은 나침반 바늘처럼 핑핑 돈다. 몇몇 후보 중 누구를 지목해야 할지 말이다. 그 오빠인가? 아니면 그놈인가? 그럼 재판관이 나타나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네.’ 하며 하나씩 작대기를 긋고 탈락시킨다. 그러다 보면 남는 인간이 없고 난 여태껏 제대로 사랑 한번 해보지 못했다는 비탄에 빠진다.


그러나 뒤져보니 재판관이 등장하기 전부터 내가 첫사랑이라 생각해온 사람이 있긴 했다. 혼자 들끓으며 북 치고 장구 치던 풋내기짓도 첫사랑이라면 그곳은 C의 자리였다. 그보다 앞선 사람은 없었다. 난 재판관에게 물었다. ‘첫사랑을 C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재판관이 허락했다. ‘자격이 충분하노라.’


C는 학창 시절 나우누리 글모임에서 만난 3살 많은 오빠다. 고1, 반팔 입던 계절에 펜클럽 정모에서 그를 만났다. 학교 끝나고 신촌 민들레영토로 가 단체석 입구에 쳐진 커튼을 걷자 눈앞에 대뜸 눈을 내리깔고 담배를 피우는 고등학생이 보였다. 난 놀라서 멈칫했다. 고삐리가 담배를? 알고 보니 그는 대학교 1학년이던 C였다. 앳된 얼굴로 담배를 피우던 모습에 반했던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다만 인상 깊긴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사실 그 전이었다. C가 고3이고 내가 중3이던 해 겨울, 모임 언니의 초대로 영화 감상회 벙개에 나갔다. 그날 스포츠머리에 감색 떡볶이코트를 입고 내내 쭈뼛거리던 사람이 C였다. 인사도 나누었는데 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중에야 “그게 오빠였어?” 하고 기억해냈다.


C는 서글서글한 만인의 친구였다. 어딜 가나 대화의 중심에 위치하고, 일대일로 친하지 않은 멤버가 없는 캐릭터였다. 나는 극내향 기질에 뾰족한 여고생이었고, 가정불화에 지질한 사춘기를 글쓰기와 음악과 친구와 모임으로 풀며 보내고 있었다. 펜클럽은 언니 오빠들이 날 받아주는 훌륭한 배설구였다. 난 그곳 사람들을 너무 좋아해서 모임만 있으면 날 빼놓을세라 쫓아나갔다. 막상 나가서는 숫기 없이 앉아만 있었지만 거기 끼어있는 게 좋았다. 내가 없는 곳에서 언니 오빠들끼리 어울린다고 생각하면 물밀듯이 서운했다. 언니 오빠들은 어린 것이 고역이어도 소외감 느끼지 않게 품어주었다.


북받치는 날이면 게시판에 날것의 문장을 적거나 홀로 채팅방을 개설해 여보란 듯 처박혀있었다. 약도 없는 발병에 모두 모른 척할 때에도 C는 어김없이 반응했다. 거칠게 내지른 글에는 철없다고 쏘아대고, 혼자 있는 채팅방에 들어와서는 자폐아처럼 굴지 말라고 훈계를 놓았다. 그는 종종 내게 말했다.


“나이답게 사는 게 좋은 거야.”


난 상관 말라고 퉁을 놓으면서도 실은 끝까지 끊지 않는 관심에 안도했다. C는 마지막까지 잡을 동아줄이었다. 내 비딱한 조숙함도 그가 날 각별히 여길 조건으로 믿고 싶었다. 훗날 그는 ‘자폐클럽’이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같은 모임을 기웃거리는 나를 걱정했다고 말했다. 저러다 어느 날 애가 자살할 것 같았다며 웃었다. 내 우울이 C의 신경을 잡아둘 유일한 무기란 걸 그때의 나도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다.


펜클럽은 10대와 20대가 허물없이 어울리는 모임이었지만 10대끼리, 20대끼리 통하는 간극도 있었다. 어쨌거나 고3이 종착지인 우리와 대학 생활을 즐기는 언니 오빠들의 상황은 달랐으니 말이다. 채팅방에 모이면 다들 C가 같은 학교 퀸카랑 사귄다고 놀려댔다. 그 퀸카가 얼마나 예쁜지 난 구경도 할 수 없었다. 한때는 나와 C, ‘달빛○○’ 언니 셋이서 매일같이 채팅방에서 노닥거리던 시기가 있었다. 달빛○○ 언니는 모임 안에서 C와 동갑내기 절친이었다. 난 언니를 무척 따르면서도 질투심에 반쯤 미쳐있었다. 여사친의 자리를 넘볼 수도, 넘본다고 차지할 수도 없었다. 그저 표내지 않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본래의 뾰족함인 척, 우울함인 척, 비뚤어짐인 척. 그래도 다 표가 났을 것이다.


시간은 더디기만 했다. 언니 오빠들이 술 마시고 연애하는 동안 난 계속 고등학생이었다.


C에게 당신이 내 첫사랑이었다고 말한 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즈음이었다. C는 몰랐다는 듯이 반응했고 난 그가 정말 몰랐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내겐 100% 과거완료 시제였다. 그 무렵 C는 집에서 결혼하라는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다. 소개팅만 100번 넘게 치러서 그 돈 아꼈으면 집을 샀을 거라고 농담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끈질기게 잘 버티는 게, 결혼할 거란 생각이 그닥 안 들었다. 나도 친구를 한 번 소개해 주었는데 애프터는 없었다.


아니란 걸 알면서도 ‘어쩌면?’이라는 공교로움이 느껴질 때가 있다. 30대로 접어들며 만남을 지속하는 멤버가 대여섯으로 고정되었다. 그들과 홍대에서 1차를 하고 나와 길을 걸을 때였다. 나는 왼쪽에 C를, 오른쪽에 두껍 언니를 팔짱끼고 있었다. 웃고 떠들다 내 몸이 기우뚱하자 C는 내 팔이 빠지지 않게 자기 팔에 힘을 주고 붙잡았다. 넘어질까 봐 잡아주는 느낌보다 더한 게 있었다. 똑바로 섰을 때 난 두껍 언니와는 분리됐으나 C와는 계속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한순간 이게 뭘까 생각했다. 어쩌면 그때가 C와 내가 열려 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고 난 훗날 생각했다.


얼마 뒤 난 남자친구가 생겼다. 사귄 지 1년이 넘었을 때쯤 모임에 데려갔다. C는 서글서글하고 예의 있게 남친을 대우했다. 내 첫사랑이 자기였다느니 하는 농담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유쾌하고 평범한 술자리. 모임이 파한 뒤 C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괜찮다. 좀 아니면 반대하려고 했는데 괜찮네. 잘 만나라.”


그리고 얼마 후 C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여느 때처럼 소개팅을 했고 그녀와 곧 결혼한다고 했다. 이제껏 버틴 세월 치고 좀 빠른데 싶었지만 부모님 압박이 임계치에 달했나 보다, 혹은 그만큼 좋은 사람을 번개처럼 만났나 보다고 대충 생각했다. 다시 모였을 때 C는 그녀와 함께 나와 청첩장을 나눠주었다. 그다음은 결혼식, 그다음은 출산이었다.


C는 현재 아이 둘을 가진 아빠다. 그는 종종 술 먹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내게 전화해서 모임을 진행하라고 지령을 내린다. “이제는 노력하지 않으면 못 만나.”라고 술 취한 목소리로 늘 같은 말을 한다. 난 행동대장으로서 단톡방에 공지를 올리고 날짜와 장소를 잡는다. 그렇게 1년에 한두 번 우리는 만난다. 만나면 20년 전, 10년 전의 이야길 끝도 없이 반복한다. C는 결혼 생활은 불행하고 육아는 지옥이며 결혼 안 한 너희가 승자라고 투덜댄다. 비혼 일동의 레퍼토리도 한결같다. “저러고서 집에 가선 제일 잘하지.” “냅둬. 여기가 대나무숲이지, 뭐.” 내 첫사랑이 자기라는 것도 무공훈장처럼 되새김질된다. 내가 이제 그 얘기 좀 그만하자고 아우성치는 것도 고정된 수순이다.


C는 모임을 성사시키는 힘든 과정을 생색내며 말한다. 자신이 첫 번째로 전화하는 건 항상 나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난 두 번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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