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음 에세이
2023. 6. 16.
요 며칠 〈육룡이 나르샤〉를 정주행했고 지금은 〈뿌리 깊은 나무〉를 주행 중이다. 방영 당시에도 재미있었지만 지금 봐도 재미있다. 썬킴의 세계사, 한국사 팟캐스트를 듣다 보니 태종 이방원은 이미 ‘킬방원’이 되어 있다. 지금은 대상화가 된 역사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살벌했을까. 그의 주변인들도 살기 위해선 그만큼 비정해야 했을 것이다. 난세에 패권을 쥐는 자에게 비정함은 필수 덕목이다. 사이코패스 유전자가 살아남은 이유는 야만과 전쟁 시대에 그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나.
나는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이방원이 사이코패스였단 말은 아니고.) 뉴스에서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이 한결같이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 걸 보며 나는 저쪽은 확실히 아니구나 싶었다. 미안함의 감각이 구분선이었다. 살면서 날 해쳐놓고 사과하지 않은 채 사라진 사람들이 반면교사로 작용했다. 관계는 투사였다. 사과 받지 못한 억한 심정을 다른 사람에게 남기기 싫었다. 그래서 난 자주 미안하다 말했다. 혹시나 그에겐 사과가 필요한데 내가 모르고 넘어갈까 싶어 일단 하고 보았다. 아니면 말면 되니까.
20대 때 같은 그룹에서 놀던 대학 동기 Y와 J가 있었다. Y는 여자고 J는 남자였고, 둘 다 내 절친이었다. 졸업 후 나는 어쩌다 J와 자는 사이가 되었다. 여느 때처럼 일 끝나고 내 자취방에 놀러와 술 먹으며 수다를 떠는데, 어느 순간 그의 욕구가 건드려졌던 것 같다. J는 말 그대로 날 덮쳤고, 난 그게 놀라기도 했지만 너무 웃겼다. “야야, 나 최미라야.” 하며 깔깔대는 날 잠깐 물끄러미 보더니 J는 하던 짓을 계속했다. 난 그 순간 섹스를 한다는 게 나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뭐 한번 잘 수도 있다 생각했다.
그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린 친구이자 섹파가 되었다. 나는 그래도 ‘친구’를 앞에 두었으나 J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그럴 수 있다 생각하는 선을 조금씩 넘기 시작했다. 나도 그 선을 유보하며 J가 그러도록 허용했다.
당시 J는 부동산 사업체를 막 시작해서 자리 잡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부자되기에 목숨건 그런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고객들에게 하는 못된 짓들을 내게 말하곤 했다. 목이 안 좋은 점포인 걸 알면서도 휘황찬란한 언변으로 팔아놓고 이익을 취했다. 그러나 그 뒤에 한 번쯤 그 점포에 혼자 가서 닭똥집 튀김에 맥주 한잔을 시켜서 먹고 오는 짓도 했다. 손님이 나밖에 없는 매장을 보는데 씁쓸하더라고 내게 소회를 말하곤 했다. J는 사이코패스는 아니었다.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냥 목적이 있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간일 뿐. 나는 킬방원을 바라보는 분이의 심정으로 J를 보았던 것 같다. 저 칼이 내게 휘둘리진 않을 거라고, 나는 J에게 수단이 아니라 목적의 영역에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나 J는 그 구분이 없었다.
J는 자신이 내 몸과 마음이 미치는 영향력에 어쩌면 도취되어 갔는지도 모른다. 난 상처받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내가 섹스에 소극적이자 그가 내 손목을 잡아 자기 손에 마주 치며 말했다. “박수도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며칠 전 나랑 자놓고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는 어제 요정에 다녀왔는데 여자들이 너무 예뻐서 자기가 젠틀맨을 하고 왔다느니 하며 허세를 부렸다. 난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다.
나르시시스트는 에코이스트를 만나면 그에 한정해 악인이 된다. J가 본래부터 사이코패스였던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어떤 기질이 그를 이만큼 더 잔인해져도 된다고 몰아갔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데 안심하게 했다. 그는 내 지위를 확인시켜 주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네 앞에서 이런 말도 서슴없이 할 정도로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바닥은 기운 지 한참이었다. 난 벼랑 끝에 있었다. 내가 붙들고 있던 친구 관계는 희미해졌고 나는 상처받기 시작했다. 날 끔찍이 아끼는 든든한 남사친 J는 어느새 없어졌다.
난 Y에게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Y는 이따금 나 없을 때 J를 타박했다. “미라 걔 지금 피투성이야.” 하는 말도 나대신 J에게 해주곤 했다. J는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중 사단이 났다. Y의 언니가 자취를 나오려 했고, Y는 부동산을 하는 J에게 집을 알아봐달라 부탁했다. J는 Y의 언니를 보고 반했던가 보다. 사심을 담아 정성껏 일을 처리하며 Y의 언니를 ‘어떻게 해보려는’ 같잖은 짓들을 했다. 그걸 안 Y는 맹렬히 분개했다. 나에게 하던 짓들을 전부 본 Y에게 있어 J는 자기 언니에게 손끝 하나 허용할 수 없는 쓰레기였다. Y는 그 생각을 J에게 그대로 드러냈고, 계약이고 뭐고 전부 파토가 났다. Y와 J의 관계는 끝났다. J는 맹렬히 거부당하던 그때 거품껴 있던 자신의 실제 지위를 깨달았을 것이다.
내게 불똥이 튄 건 Y 쪽에서 부동산으로 넘어간 계약금 20만 원이었다. 아무도 그 돈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저쪽에 전해달라며 그 돈이 내 통장으로 넘어왔다. 난 Y와 J에게 번갈아 연락하며 가져가라 했지만 마치 악취 나는 쓰레기인 양 둘 다 맹렬히 거부했다. 둘 다 무언가를 맹렬히 거부함으로써 자기 위상을 세우려 했다. 나는 낀 새우등이 되어 생각했다. 너희에게 나는 뭐냐, 대체.
지금 생각하면 인터넷을 뒤져 부동산 계좌번호를 알아내 쏴버리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땐 참 알아내지지도 않았다. 난 악취 나는 음쓰 같은 그 돈을 세이브더칠드런에 J의 이름으로 기부했다. 나한테 그랬던 J와 그걸 다 아는 Y가 쌍으로 이짓거리들을 하고 있고, 내가 이 돈을 쥐고 이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Y는 모든 게 끝난 뒤 메일을 보내 사과했다. 난 용서 없는 답장을 보내며 말미에 썼다. 저질러놓고 사과하는 건 쉬운 일이라고. 그래도 사과조차 안 하는 J보다는 네가 낫다고. 화해나 용서는 없었지만 난 적어도 Y에게 내 위상을 회복했다. 실은 그것이 사과의 순기능이었다. 용서나 관계 회복이 아니라 피해자가 위상을 회복하는 것. 사과받지 못한 피해자가 스스로 자기 위상을 회복하려면 오랜 시간 큰 비용을 치러야 한다. 난 J에 대해서는 그래야 했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사과하는 건 쉬운 일이다. 어려운 건 애초에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린 몰라서, 혹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어서 타인을 상처 입히며 산다. 그러지 않고 살기가 가능한가. 타인에 대한 이해가 그저 노력의 연장일 뿐이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미안하다 말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