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음 에세이
2023. 6. 23.
아파트 단지 안 5분 거리에 동네 미용실이 하나 있다. 이름은 세리헤어. 중년 여성 한 명이 일하는데 주 고객이 동네 아주머니들이라 그런지 무척 싹싹하다. 손님들을 친근하게 언니라 부르고 말투는 어딘가 모르게 약간 어수룩한데, 그 ‘어딘가 모르게 어수룩함’이 이곳은 편안하고 다정한 마두동 동네 미용실이란 사실을 상기시킨다.
사실 세리헤어의 미용사는 능숙한 멀티플 커뮤니케이터다. 앞손님 커트를 하면서도 머리에 비닐을 쓰고 기다리는 뒷손님의 표정을 거울로 빈틈없이 살핀다. 뒷손님의 인내심 게이지가 떨어져간다 싶으면, 큰길 건너편에 태국마사지 숍이 새로 생겼는데 가봤냐느니 새송이버섯을 어떻게 해먹어야 맛있냐느니 송혜교랑 송중기랑 어쨌다느니 하고 뒤통수로 말을 건다. 마구 말을 걸면서 일순 정신을 혼미하게 하여 시간을 버는 것 같지만, “요것만 끝나고 빨리 해줄게, 언니야. 너무 기다렸다.” 하며 너의 바닥난 인내심의 상태를 충분히 알고 자신이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도 주지시킨다. 필요한 순간 그 자리에 딱 맞는 가벼운 대화 소재를 찾아내 분위기를 환기하고 그 사이사이에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진심을 책갈피처럼 끼워 제공하는 미용사. 사람들 사이에 왜 가십이 필요한지 납득하게 되는 풍경이다.
주말 늦은 오후 시간대면 쾌남으로 보이는 남편이 아이스커피를 사갖고 와서 아내의 퇴근을 바라지하기도 한다. 미용사는 출입문으로 들어오는 남편 손에 들린 커피를 보자마자 나에게 “커피 좀 드실래요?” 하고 종이컵에 따라 준다. 어느 날은 커트가 끝날 때쯤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리자 “어우, 안 돼. 언니 몇 동이야? 데려다줄게 가요.” 하며 내 아파트 현관까지 우산을 씌워주었다. “감사합니다” 한마디면 더 감사할 것도 미안할 것도 없는 5분 거리가 나는 참 편했다.
세리헤어 미용사는 내가 귀찮아하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날 단골로 생각한다는 게 표시는 날 정도로 적당히 말을 건다. 어쩔 땐 무슨 일 하냐고 묻고, 어쩔 땐 맘대로 안 되는 딸자식 푸념을 하고, 어쩔 땐 내 곱슬머릴 만지며 매직펌을 권한다. 그 모든 대화의 수위와 양이 딱 적당하다. 공백이 너무 무겁고 비대해지지 않게 중간중간 터뜨리며 가는 느낌이랄까. 말없는 손님 콘셉트로 묵묵히 앉아있다 보면 말없음의 관성 때문에 입술이 더 딱 붙게 되기 마련이다. 그럼 막상 요구할 게 있을 때 발화하기가 부담스러워지기도 한다. 미용사는 그 점을 알고 입 여는 게 큰일이 되지 않도록 경량화해준다.
그냥 이런 사이. 오며가며 아는 얼굴. 가깝다 멀다 할 것도 없고 부담 없이 호의만 주고받는 얕은 이웃. 실은 이런 관계가 풍성해야 관계의 외연이 넓어지고 삶이 윤택해지는 건데, 좁고 깊음만 추구하던 나는 이런 관계를 무척이나 홀대해왔다.
세리헤어에 다녀와 생각에 잠긴 날이 있었다. 가운을 입고 앉자 미용사가 내게 말했다. “언니 얼굴 좋아졌다.” 거기까진 늘상 하는 인사말로 받았다. 내가 심쿵(?)한 건 그다음 말이었다. “지난번엔 좀 안 좋아 보였는데.” 듣자마자 지난번에 온 게 언제였는지 헤아릴 것도 없이 수긍이 갔다. 미용실 방문 주기라면 몇 달 전일 테고 그땐 한창 불안에 시달릴 때였다. 지금은 고비를 넘긴 후였고 스스로 좋아지고 있다고 믿을 때였다. 진심이 아니라면 공연히 덧붙일 필요가 없는 말. 내겐 그 말이 지표 같았다. 거시 거리의 미용사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정말로 좋아지고 있는가 보다고. 그가 내 믿음에 도장 찍고 승인해준 셈이다.
몇 달에 한 번 오는 단골손님의 안색을 기억하는 미용사가 우리 동네에 있다. 난 그때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앞치마가 천인지 비닐인지도 아니고 얼굴이 좋다, 안 좋다 같은 주관적인 인상은 더더욱. 그는 내게 동네 미용사일 뿐이니까. 그러나 나도 그에게 동네 손님이었을 뿐이다.
생각하다 보니 오래전 연남동으로 자취 나올 때 계약했던 부동산 담당자가 떠올랐다. 그는 6년 후 집주인이 바뀌어서 계약서를 새로 쓰러 방문했을 때 단번에 날 알아보았다. 나야 첫 자취방을 소개해준 중개인이라 기억한다지만 그는 그사이 수많은 손님을 만났을 텐데 날 어떻게 알아봤는지 신기했다. 손님을 상대하는 직업군은 때때로 신비로운 능력을 보인다.
아무튼 난 세리헤어가 편해서 그리로 간다. 미용사가 내 머리에 가위를 꽂거나 화상을 입히는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용할 것이다. 때때로 있는 그대로의 표정을 들고 가 그녀에게 기록하고, 나도 딱 우리만큼 얕고 얇은, 그에 대한 기록을 저장할 것이다. 나는 세리헤어의 단골손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