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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근육통 기능의학 병원| 장장 7년의 세월이다.

근통이의 하루|기능의학 병원을 가다 - 4편

*소설: 섬유근육통 환자의 치유 성장기입니다. 근통이의 하루 4편 - 기능의학 병원을 가다

기능의학이란?


그런데 이게 무슨일이고...

데스크 앞에 누워서 생떼를 부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무심코 긴장되었던 나를 한순간에 녹여버렸다.

"안 해! 안 한다고... 주사 싫다고! 무섭다고!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한다고 했잖아!"

주사를 맞자는 말에 잔뜩 겁을 집어 먹고 병원 오기 전 엄마의 약속이 틀렸음에 몸으로 항의하는 분위기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이런 상황을 예상이나 한 듯 얼굴에 웃음기를 품고서 불편한 기색 없이 바라보고 있다.


강남에 위치한 병원이라 근거 없는 괴리감에 내가 가도 될만한 곳일까 걱정했었다.

백화점 명품 매장을 문 앞에서 바라만 봤는데 예상치 못하게 자동문 열려버린 상황처럼 잔뜩 기죽어 있던 게 사실이었다.

'그냥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데 직원이 말을 걸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돈도 없고 생각해보니까 사치인 것 같은데 어떻게 거절하지?'

상상을 넘어선 망상은 모두를 불안하게 하고 결국 포기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막상 처음 본모습은 장난감 할인점이나 동네 대형마트에서 쉽게 보는 아이가 생떼 부리는 친숙한 모습에 마음이 굉장히 편해진다.


바빠서 정신없는 사무적인 태도의 데스크 직원과의 진료 접수를 마치고 쑥 둘러본 병원의 모습은 동네 여느 병원과 다를 바 없었다.

사실 호텔과 같은 분위기의 압도되는 병원 분위기를 상상하고 왔지만 대기실의 풍경은 반대로 포근한 인상을 준다.

바깥 붙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줄까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엄마와 딸이 보인다.

요즘은 국제결혼도 흔한가 보다. 패션잡지의 모델처럼 멋진 옷을 입고 앉아서 각자 핸드폰을 보고 있는 부부도 앉아있다.

진료를 받고 나온 사람인 듯 보이는 젊은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기의 결과지를 복기하고 있다.

메모지와 펜을 빌려 골똘히 뭔가를 적고 있는 내 또래의 중년의 여성의 찌푸린 이마주름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을 곁눈질로 보고 있자니 적잖은 외로움이 밀려온다.

처음 이유 없는 통증과 전신의 이상 증상이 발생했을 때만 해도 많은 관심을 받았었다.

7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희미해져 버린 아니면 이런 반복되는 상황에 무뎌져 버린 주변인의 따뜻했던 시선은 이제 건조해져 버렸다.


진통제를 복용하면 우울증 증상 완화에 도움된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마음의 아픔과 신체의 아픔이 동일한 것일까?

외롭고 우울한 것도 뜨거운 난로를 만져 통증을 느끼는 것도 같은 아픔일 게 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아파서 외롭고 또 외로워서 아픈 2배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고독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회 공동체 안에서 돌봄을 받으며 함께 성장하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신의 목소리가 울리고, 조상들의 영혼이 힘을 불어넣어 주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지금 혼자라는 생각에 몸서리치게 외롭다.

섬유근육통이라는 전쟁에서 나는 패잔병이지만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주변인들이 찍어버린 인생 실패자라는 낙인이다.

다시 나는 어두운 절망의 우물의 심연 속으로 다시 가라앉는다.


맞은편을 바라보니 환자 보호자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초점이 맞지 않는지 안경을 한 손으로 들춘 채 책을 읽고 있다. 대기실의 낮은 책상에 가지런하게 놓여있던 책이다.

강렬할 빨간색 표지에 '힐링 알고리즘 바로잡기'라는 제목과 함께 '당신은 진짜 건강해지는 비밀을 알고 싶은가?'라는 강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네! 그 비밀 좀 나 좀 알려주세요!' 마음속으로 목청껏 외쳐본다.

나도 얼른 책을 집어 들어본다.

묵직한 책의 무게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손목이 뻐근해져 눈가가 다시 찌푸려진다.

눈에 모래 낀듯한 빠짝 마른 침침한 나의 시선이 도발적인 문구의 책의 뒷면에 고정된다.


'당신이 건강해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

과연 이런 게 있단 말인가? 최첨단 시술이나 영양제를 이야기하려는 것인가?


'병든 물고기를 아무리 치료해주어도 낫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물고기가 사는 오염된 물은 그대로 둔 채

물고기의 증상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늘 아픈 이유는 해당 부위만의 국한된 문제가 아닌

전체 시스템 속의 힐링 알고리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힐링 알고리즘 문제를 바로잡지 않은 채

각각의 증상과 질병 치료에만 집중하다 보니 제대로 낫지 않고

반복되거나 악화되는 것입니다.'


'물속에 사는 나는 물고기

깨끗한 물속의 나는 건강한 물고기'

고승이 자신의 깨달음을 오도송으로 노래하듯이, 머리에 꽉 들어차 있던 단단한 선입견의 껍질에 금이 가버린 듯 시나리오가 선명하게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그렇다.

내가 지금 섬유근육통으로 고통받는 이유는 약이나 영양제를 먹지 않아서가 아니다.

약이나 영양제를 먹는다고 완치되는 것도 아니다.

최점단 의학을 연구하는 대형병원, 근본을 치료해야 한다고 목놓아 말하며 영양제를 소개하는 기능의학병원, 인터넷이나 방송에서 선전하는 신기한 이름의 식재료와 화학성분들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지금의 나를 만든 내 안의 그리고 외부의 환경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범인은 바로 나다!



문득 딸아이의 영어 숙제를 도와주다 알게 된 예문이 떠올랐다.

동물 관련 영어 단어 숙제였는데 낙타를 뜻하는 camel에 대한 이야기다.

"낙타가 영어로 카멜이네, 낙타가 카라멜 색이니까 카멜 카멜 하고 외우면 되겠네!"

아이는 찌푸린 눈으로 나에게 말한다.

"엄마 그거 아니야. 엄마는 어렸을 때 열심히 안 했나 봐!"

의기양양해하는 딸아이의 시선을 뒤로하고 찾아들어본 발음은 '카멜'이 아닌'캐믈'이었다.

나는 아이의 작은 핀잔에 큰 굴욕을 당한 듯 멋쩍어했었다.

찾아본 김에 읽어 내린 예문이 바로 'It‘s the last straw that broke/breaks the camel's back.'이다.


'낙타 등을 부러뜨리는 마지막 지푸라기'가 기능의학과 연관되어 떠오른 것이다.

낙타는 까마득히 끝없이 펼쳐진 뜨거운 사막을 대표하는 동물이다.

물을 마시지도 않고서도 오랫동안 사막의 열기를 버텨내는 강인한 생명력의 캐믈의 등을 지푸라기가 부러뜨릴 수 있다는 말을 무엇일까?


낙타는 '사막의 배'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수백 킬로그램의 짐을 실어 나를 수 있다고 한다.

이미 수백 킬로그램의 짐이 실려진 낙타의 표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차분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 짐들을 겨우겨우 버텨내던 등 위에 낙타 주인의 욕심과 같은 깃털처럼 가벼운 지푸라기가 실리게 되고 한계를 넘어선 낙타의 등은 부러지고 말았다.

끔찍이 절규하는 낙타의 신음소리!

컵을 넘치게 만드는 마지막 한 방울이 바로 하찮아 보였던 지푸라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

당장은 부러진 낙타의 등을 돌보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그와 함께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등을 부러뜨리게 된 근본 원인인 한계까지 차 버린 짐을 내려줘야 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일으킨 짐의 실체는 결코 지푸라기가 아니다.

원래부터 실려있던 과도한 짐이 바로 범인인 것이다.



"지금까지 무슨 검사나 치료받으셨나요?"

처음 병원 데스크에서 진료 접수를 할 때 직원이 간단한 설문조사를 하면서 물었던 질문이다.

"다 해봤어요. 안 해본 것 없이요."

"그럼 지금 무슨 치료를 받고 있나요?"

"대학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랑 도움된다는 영양제 먹고 있어요. 아플 때 집 근처 한의원에서 침 치료받고 있고, 예전에는 한약도 몇재먹었는데 먹어도 크게 없는 것 같아서 안 먹은 지 꽤 됐어요. 지금 먹고 있는 약은 챙겨 왔어요" 


낙타 등을 부러뜨린 마지막 지푸라기에 현재 나의 상황을 대입해보았다.

현재 먹고 있는 약들과 영양제들이 낙타의 과도한 짐을 내려주는데 도움 되는 치료일까?

진통제와 항우울제, 수면제만으로는 섬유근육통 증상을 가리기에 급급할 뿐 나를 압박하는 짐을 내려주지는 결코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번쩍 든다.


과연 내 등에 실린 한계를 넘어서버린 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짐을 내릴 수는 있을까?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게 만드는 마지막 지푸라기가 혹시 있지는 않을까?

혹시 내가 찾아먹던 좋다는 음식들, 영양제들, 과도해 보일 정도인 여러 치료들이 오히려 나의 등을 더 짓누르는 지푸라기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기능의학 병원을 가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현대의학은 질병을 치료하지만 기능의학은 질병이 되기 전 상태인 미병 상태부터 치료한다고 한다.

그리고 질병의 만든 근본 원인에 더 관심을 두고 접근한다고 하는데... 

결국 진료실을 나올 때면 아니면 기능의학병원에서 관리하는 블로그의 내용에서 제시하는 질병 치료 및 관리의 해결책은 특정 영양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나는 '물속에 사는 물고기'의 비유에서 기능의학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진짜 가짜 기능의학이 어디 있겠냐 마는 BDJ가 이야기한 나의 건강미래를 위한 전문가, 나를 도와 함께 할 동료들을 선택할 때 증상이나 낙인찍어 버리는 진단명이 아닌 나의 등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을 찾고 내려놓고자 함께할 사람들을 고를 것이다.



내 차례가 되었나 보다.

풍부한 진료와 상담을 위해서 자율신경계 관련한 기본검사를 받고 진료를 받기로 했다.

전체 척추 X-ray와 자율신경계 검사를 위해서 속옷까지 벗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탈의실에 들어가 보니 이미 검사나 진료가 끝났는지 거울을 바라보며 옷매무새를 고치는 아주머니가 한분 계셨다.

막 옷을 벗고 재빨리 환자복으로 갈아입으려는 찰나에 아주머니가 말을 건다.

"저기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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