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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여자 Dec 16. 2022

과감한 포기를 안고 선택

어쩌다 보니 투자자 9.

우리 부부는 서로 입을 꼭 다문채 별 말을 않고 있었다. 사장님과 마주 서서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다.


"누나한테 제가 한 말은 다 사실이에요. 새벽에 기차가 다니는데 그 시간은 시끄럽고, 여기서 우측으로 차 타고 가시다 보면 초등학교가 있는데 차로는 금방인데 걸어서는 족히 20분은 걸려요. 근데 걸어가고 싶어도 걸어갈 수가 없어요. 중간에 인도가 끊겨요. 그리고 차로 싣어다 준다고 해도 학교 분위기가 영 별롭니다. 조금 못 사는 동네에 있는 학교라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해요. 어찌 되었건 부모님들께서 이쪽으로 안 보내고 싶어 해요. 여기는 딱 까놓고 초등학생 자녀 키우기엔 적합하지 않아요. 이 아파트는 이 아파트만의 수요층이 있어요. 회사 있는 저 쪽보다는 조금 조용하고 한적하다는 그런 장점도 있고 지금 보는 저 건물이 대형마트고 여기 길만 건너면 하천이 운동하기 아주 좋아요. 무엇보다 신축이잖아요. 여기가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데 입지 때문에 가격이 안 올랐죠. 제가 보기엔 원하시는 조건을 고려했을 때 이만한 물건은 없을 듯싶습니다. 지금 이 가격이 분양가보다 저렴해요. 그때 분양권으로 입주한 사람들은 지금 가격이면 손해가 맞아요. 여기가 이렇게 가격이 안 오를 이유가 없는데 지방은 편견이 생기면 그 편견을 깨기가 쉽지 않아요. 여기 사람들은 여기가 강 건너라고 안 찾아요. 예전부터 강 건너는 침수 피해도 잦고 여러모로 안 좋았던 건 사실이죠. 근데 지금은 그런 거 없어요. 아파트 지으면서 건설사들이 침수되게 지었겠어요? 계속 살던 현지인들은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니 이쪽은 그냥 아예 무시하는데 무턱대고 무시할만한 집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이 집 괜찮아요."


너무나 솔직한 말씀이셨다. 너무 솔직하셔서 더 이상 뭘 물어볼 게 없었다. 우리가 궁금한 것 이상으로 숨기는 거 없이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사장님께 신뢰가 생겼다. 어쩐지 사장님 얼굴을 계속 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장님은 훤히 자리를 떠났다. 계약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시원한 태도였다.


선택해야 했다.


- 남편이 보고 마음에 들어 했던 42평과 같은 아파트의 34평


- 10층 건물의 7층으로 로열층


- 거실 앞은 뻥 뚫린 시원한 뷰


- 기차가 지나가서 소음이 있지만 내가 원하는 신축


- 구조는 방 3개의 화장실 2개 거실과 주방이 있었고 앞뒤로 널찍한 베란다


- 상습 침수 지역인 강 건너에 위치


- 지역 전체 발품을 팔아보니 아파트 가격이 납득


- 예산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매매가









남편과 하나 둘 짚어가며 상의를 했다.

동선이 꼬인 부분 없이 한눈에 집 안이 쏙 들어오는 전형적이지만 잘 빠진 34평 아파트의 구조였다. 단점을 빠르게 고려해 결정해야 했다.


초품아만 배제시키려고 한 거였는데 이 아파트는 아예 초등학생 자녀가 있으면 거주하면 안 되는 아파트였다. 위 상황이 마음에 조금 걸리긴 했지만 초등학생 자녀가 없으니 이 문제는 과감하게 배제시키기로 했다. 초등학교까지 고려하면 이 동네 자체를 떠나 구축으로 가야 했다. 그것 또한 내키지 않았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함에 있어 너무 먼 미래를 고려해 현재의 욕구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초등학교 없는 신축 아파트는 우선 통과였다.


기차소리.

사실 들어보지 않아서 어느 정도의 소음인지 가늠이 안 됐다. 분명한 건 하루 종일 오가는 기차가 아니라 화물용 기차가 지나는 길인지 횟수가 많지는 않다고 했다. 오히려 거실에서 내려다 보이는 그 기찻길이 낭만 있어 보였다. 소음을 듣기 전이니 그랬을 테지만 어찌 되었건 일정 소음은 감수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겁 없고 무서운 생각을 했다.


지역 주민들이 선호하지 않는 강 건너 마을의 인식.

선호지역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3년 이내 신축은 이 도시 어디에도 없었다. 선호지역의 가장 근래 신축은 7년 차 정도 되었는데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할 수 있는 선택 중에 최선의 선택을 하면 되는 거다.'


최고로 좋은 아파트가 이곳이 아닌 것은 진즉 알고 있었다. 다만 최고를 선택할 여력이 없으니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놓고 최선을 다해 선택하는 거다.


강 건너라고 해서 비어 있는 집이 있는가? 없다. 모두 사람들이 꽉 들어차 나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곳 또한 주거지다. 침수 피해가 빈번했던 동네라고 하지만 지금 아파트 자리는 침수 피해를 입은 적이 없고 또한 이런 사실을 건설사에서 인지하고 설계 및 건축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시에서도 재발 방지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진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심리를 가졌다.


집을 매수하고 향후 3년 동안 입주 물량은 1100세대에 불과해서 신축이라는 타이틀은 당분간 유지할 것 같았다.


지역 전체를 다 돌아보고 연식 대비 가격을 비교해 보니 이 집의 매매가가 납득이 됐다. 이 정도 가격이면 잘 사는 거라는 판단이 섰고 결코 비싸지 않았다.


'어쩌지, 어쩌지.'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계약을 하기로 했다.











동계올림픽 유치가 확정되고 그로부터 13일 후 계약금으로 천만 원을 송금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주사위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굴러가도록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이 집에서 행복하길 바랐고 우리 부부 역시 집 값이 조금 올라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고 설렘을 느끼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을 마무리 지었다.










늦었다고 생각했다. 발령이 결정된 시기가 내내 아쉬웠다. 회사에서 조금만 더 일찍 결정해 줬더라면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집을 구하기가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주어지지 않은 조건을 바랐다.


보유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조금 더 빨리 접근하지 못해 아쉬웠던 마음은 지금은 온데간데없다. 그렇게 온 동네를 샅샅이 뒤져 찾은 집이 지금 사라고 하면 절대 안 살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총체적 난국이었지만 그 당시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선택했고 그 선택에 후회하지 않았고 끔찍하게 아끼고 정을 주면서 보유했다.









그렇다. 입지 좋은 곳은 주인이 빨리 나타난다. 입지가 조금 덜한 곳은 모든 게 느리다. 제 주인이 나타나기도 오래 걸리고 아파트 가격 상승도 느리다. 그래서 초조하고 불안하고 답답할 때도 분명 있다. 하지만 영원히 주인을 못 찾거나 다른 곳은 다 상승하는데 혼자서 곤두박질치거나 그렇지는 않다. 다만 좀 느릴 뿐.


올해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던 날 이 집을 매도했다. 이 집에 입주하고 바로 임신을 했는데 그 아이가 벌써 11살이 되었다. 아파트 연식도 아이의 나이만큼이나 많아졌다.


우리는 분명 투자자가 아니었다. 실거주 목적으로 오롯이 거주하고 싶은 집의 조건만을 찾아 매수한 집이었다. 우리가 거처를 옮기면서 세입자를 못 구하면 어쩌나 섣불리 고민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 다르지 않다. 내가 살고 싶은 집은 다른 사람도 살고 싶어 한다. 이 집은 어찌 보면 최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간섭하는 선배들이 부담스러웠다. 조언이라고 건네는 말들이 간섭으로 느껴졌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자꾸 넘고 경계를 침범하는 것 같아 얄밉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그래 그들이 말하는 아파트는 대체 뭐야?'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고 정확히 전셋집을 구한 5개월 후 그들의 입을 봉해 버릴 자물쇠로 내 아파트 소유를 택했다.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구매한 집이라 사실 그들에게 내 자물쇠가 통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따금씩 만나는 그들로부터 집과 관련된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았다. 


"집은 어떻게 했어?"


그동안 지내온 모습으로 짐작해 본다면 내게 분명 물어야 할 터인데 어느 누구도 저렇게 묻는 사람이 없었다.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나간 탓일 테지.


 








남편은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다. 군에 입대 후 단 한 달도 거르지 않고 꼬박 적금을 들었다. 결혼할 때 집을 마련해 오는 대신 적금 통장을 들고 왔다. 그 적금 통장을 담보로 전세금 대출을 받았고 우리는 그렇게 소박하게 시작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 소박하지 않았다. 굵직했다.



남들 보기엔 적은 돈일 수 있다. 하지만 내 기준에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을 잘 활용하고 싶었던 남편의 마음이 내게는 전해졌지만 내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남편과 내 입장은 달랐다.


결혼 전에 모은 돈을 전부 친정에 드렸다. 아빠가 CPR을 받고 소생하셨을 때 매달 얼마의 치료비가 들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엄마는 결혼을 천천히 하고 조금 도와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아빠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서둘렀다. 


사실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 순간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고 출발점에 그와 나 양가 부모님의 모든 축복이 함께 했으면 했다. 


아빠가 없는 결혼식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빠라면 내 짝으로 어떤 사람이 괜찮을지 한눈에 알아볼 거라 생각했다. 


내과 병동 6인실 작은 모퉁이 옆 침대에서 산소줄을 코에 끼우고 겨우 반쯤 앉은 채로 예비 사위와 어색한 첫 대면이었지만 그 시간은 따뜻했고 평온했고 즐거웠고 행복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우리가 결혼을 하겠다고 찾아간 곳이 납골당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서 결혼식 축의금도 모두 엄마 손에 쥐어줬다. 줄 수 있는 모든 걸 아빠에게 주고 싶었다. 살아 계신 동안에 고통 속에서 몸을 웅크리더라도 마음은 편안하시길 바랐다. 돈으로부터 자유롭길.








그래서 가진 거라고는 직장이 전부인 삶을 더욱더 받아들여야 했고 매달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을 위해 인내하고 놓지 말아야 했다.


결혼 전 '나는 아무것도 없이 너와 결혼해야 된다'라고 고백했을 때 그는 이해해 줬다. 고마웠다. 가진 게 없었기에 그에게 바랄 수 없었고 전셋집도 너무나 감사했다.


이런 상황을 똑같이 접하더라도 사고방식에서 그 해석은 동전의 양면처럼 나뉠 수 있다는 걸 살면서 깨달았고 여전히 깨닫는 중이다.


나를 자극하고 긁어줬던 그들로부터 생긴 오기가 내게 실행력을 가져다줬다. 그랬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말의 뉘앙스가 얄미웠을 뿐 그들이 내게 했던 간섭은 극명한 사실이었다. 동생 같았으니 참견했고 간섭했었으리라 생각하고 뒤늦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본다.






집을 갖는다는 건 그랬다.


등기부등본을 소유함으로 인해서 갖는 든든함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말 큰 뒷배였다. 꿈꿔보지 않았던 일이 현실이 되었고 현실을 꿈처럼 여기며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열쇠를 숨기고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는 횡포로부터 편안해질 수 있었고 집주인이 타인이 아닌 나라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 주는 삶의 위로는 정말 달고 컸다.


퇴근하고 내 집으로 휴식하러 들어가는 길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금요일 저녁이면 집에 오는 남편을 생각하며 넓은 주방에서 마음껏 칼질을 하고 냄비며 양푼을 올려놓아도 부족하지 않은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요리를 했다. 비좁은 부엌을 사용할 때는 바닥까지 오만가지 주방 살림살이를 널브러뜨리는 게 당연한 거였는데 동선에 맞게 알맞게 제작된 싱크대와 아일랜드 장은 이런 것들을 충분히 보완해 줘서 사는 내내 침이 마르도록 내게 칭찬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은 내게 과분했다. 책장을 넣은 부엌의 앞 방은 책장의 반도 채워지지 않은 전공서적을 두었는데 사는 동안 그 방에 몇 번을 들어갔는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붙박이장이 있었던 방을 드레스룸으로 사용했는데 사실 안방을 드레스룸 겸 안방으로 사용해도 될 터인데 그냥 공간이 남으니 넓게 쓰려고 작은방을 드레스룸으로 사용했다. 


안방에서 일어나서 욕실에서 씻고 옷을 입기 위해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작은 방까지 가는 건 생각보다 멀었고 귀찮았다. 안방 하나에 모든 것을 다 넣고 편히 쓰고 싶었지만 버려지는 공간이 아까워서 기꺼이 걷는 노동을 감수했다.


앞 뒤 베란다는 널찍했는데 그 어떠한 물건도 없었다. 말 그대로 회사만 다니는 직장인이었고 남편은 주중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살림이 늘어날 것이 없었다. 채우고 싶었지만 감각이 없는 나는 뭘로 채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황량한 벌판을 바라보듯 그렇게 텅 빈 공간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현관 입구 왼쪽 벽은 붙박이 신발장이었다. 그 공간도 텅텅 비어 있었다. 우리 둘의 신발 개수가 많지 않았고 물건 사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기에 모든 공간에 여백은 상당했다. 이렇게 큰 집을 얻은 게 애초에 조금 과한 일이었다는 걸 살면서 차차 깨달았다.










나와 그를 위한 집이라면 24평 아니 18평도 충분했다. 다만 그들에게서 생긴 오기를 한껏 어딘가로 표출해야 했는데 그게 신축 34평이 표적이 된 거였다. 더 이상 나 건드리지 말라고 안전 무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위한 것이 아닌 그들을 위한 방패로 이 집을 구매한 것이다.


목적이 조금 유치했지만 한 여름 발에 땀나도록 걸어 다닌 덕분에 우리가 정한 목표를 이뤘고 그 과정에서 행복했고 달고 쓴 과정을 모두 경험했으니 이만하면 충분한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고 감히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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