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동주>를 보고 호기롭게 다음 작품도 빌려뒀으나 이내 찾아온 시험기간(고등학교 시험 대비는 중간고사 끝나자마자 기말고사 이런 식이라 시험 대비 기간이 엄청 길다는 걸 잘 모르는 고딩이 엄마) 때문에 두번째를 시도하지 못했는데 드디어 '고딩아들과 무비무비' 두번째 시간을 가졌다. 영화는 중간에 엄마 혼자 이 영화 저 영화 골랐었지만 결국은 처음에 정한 이준익 감독의 <박열>.
<동주>와 시대적 배경이 겹치지만 윤동주가 유명한 것에 비해 박열은 이 영화를 알기 전에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의 사내였다. 일단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고, 그렇게 책을 읽어도 기억에 남을만큼 이 이름을 읽은 기억이 없다. 윤동주가 시인이었기 때문일까,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미남이라서일까? 엘리트 교육을 받은 박열이 3·1운동 가담 혐의로 일본으로 넘어와 관동대지진 이후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유죄를 선고받는다는 서사는 윤동주의 서사에 못지 않은데, 왜 여태 그 이름을 몰랐을까? 하긴, 송몽규의 이름도 영화 <동주>를 통해 알았으니 내가 아는 이름이 얼마나 적은지. 그런 면에서 이준익 감독은 기억할 만한 이름들을 들추어내는 소명을 수행하는 듯 하다.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은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의 시 <개새끼>에 반하면서부터이다. 아나키스트였던 두 사람이 사랑을 하고, 동거를 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데에 적극적인 모습은 두 사람의 운명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불안했지만 억압된 국민을 대신하여 과감하게 행동하니 통쾌하기도 했다. 나는 아나키스트라는 말을 장동건 주연의 영화 <아나키스트>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때 영화를 같이 보던 사람 역시 아나키스트 흉내를 냈었기에 이 커플이 더 친밀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아나키스트 흉내내기는 얼마나 소꿉장난 같단 말인가! 짖지도 죽지도 못할 겁쟁이들의 아나키스트라는 호칭은 그저 허세에 불과하단 걸 이 영화를 보며 절실히 느꼈다. 아나키스트라는 말을 사용하진 않지만 나를 닮아 독립을 수시로 꿈꾸는아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큰 걱정이 없는 건, 너 역시 나와 크게 다르진 않게 그저 흉내내기에 불과할 것이다는 유전자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다시 영화로 들어가보자. 이 영화에서 배우 김인우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처음 눈을 마주쳤다.
- 어 저 사람?
- 진짜 일본 사람인가? 자꾸 일본 사람으로 나오는데?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웠는데 이번 역할은 지난 번 역할보다 악독해서 반가움이 미움으로 금세 바뀌었다. 아들은 가네코후미코와 미즈노 렌타로를 보며 다시 물었다.
- 엄마, 저 사람들 다 일본 사람인 거지?
- 아니 한국 배우야 전부.
- 전부?
- 아마 그럴 걸?
전부냐고 되물으니 급히 자신감이 없어져 손으로 황급하게 인터넷을 검색한다. 아들에게 뭔가 더 권위있는 사람으로 보이고픈 마음이 지금 너무나 간절하다. 아들의 등 뒤 소파에서 화면을 보는 척 하며 열심히 검색하니 가네코 후미코 역은 한국 배우인 최희서이고, 불령사 배우들도 다 한국인이 맞는데 김인우와 마지막 재판관 역인 김수진은 재일교포였다. 김수진이 이끈 재일교포 극단 '신주쿠 양산박' 단원들 다수도 영화에 출연을 했다니 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더구나 박열의 변호인인 후세 다쓰지 역의 야마노우치 타스쿠는 그냥 일본인. 이 사람만 아니어도 다 한국인이라고 우길려고 했는데 내 체면을 차리느라 아이를 무지하게 둘 순 없으니 사실대로 알려줬다. 아들은 최희서의 어색한 한국 발음이 영락없는 일본인 같아 보였는지 많이 놀라워 했다.
내가 박열 이름을 모르는데 아들인들 박열 이름을 알겠는가?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두 사람이 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권력자들을 힘껏 조롱하는 모습을 보며 사랑과 정의, 용기의 미덕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 하지만 엄마의 입장이 아니라 관람객의 입장에서 이준익 감독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못지 않게 대단해보였다. 그는 쉽게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굳이 일본땅에서 일본 내부에서의 이견들까지 보여주며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균형감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내가 아무리 일본의 입장을 헤아려보았음에도 불구하고'로 느껴져 더 설득력이 있었다. 단순히 우리나라가 일본에 갖는 통한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런 일들을 벌였는지를 양측 관람객들에게 모두 납득시키고자 했다고 느꼈다. 너희는 조선땅에서 뿐만 아니라 너희땅에서도 우리를 핍박했노라, 그것이 요리 보고 저리 보아도 역사적 사실이노라 말하는 것 같아 더 설득력을 가졌다.
- 일본은 왜 저렇게 자기들이 문명 국가라는 걸 강조할까?
질문하지 말라는 주의 사항을 나는 알면서도 기회를 노리고, 아들은 간혹 잊는다. 그래서 엉겁결에 모두 대답해준다.
- 자기들이 문명 국가이고 싶어서?
- 그 말은 문명 국가가 아니라는 거지!
- 그렇네!
아직은 저 멀리까지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생각하게 하는 데엔 질문만한 게 없는데 그걸 못하게 하다니! 포기하지 않겠다!
일본인들은 오래 전 미개했던 시절에 대한 열등감이 커서 개방된 이후부터는 신식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들과 같은 문명인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하기에 당시 일본 지휘부에서도 '문명 국가'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이는 곧 그들의 열등의식인 것이다. 하지만 그 입장도 이해가 간다. 과거 미개한 족속이라는 평가를 얼마나 오래 받았을 것인가? 예전에 우리나라에 찔끔찔끔 노략질하러 왔을 때 우리나라도 그들을 학살했다는 역사서를 읽은 적이 있다. 피해의식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문명 국가'가 되고 싶었고 그나마 '문명 국가' 코스프레라도 했기에 그 정도였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 끔찍한 생각이 든다. '보는 눈'의 중요함을 애써 외면하며 아나키스트가 되겠노라 했던 젊은 여인은 이젠 '보는 눈' 덕분에 사람이 사람됨의 최저지점을 내려가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아는 중년이 되었다. 아직 '보는 눈'을 따위라 부르는 아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너 또한 지나고서야 알지 않겠니?
영화가 끝나고, 영화 이후의 박열의 삶을 보여주며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이제훈과 최희서의 포즈도 꽤 멋있었지만 실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뭉클하고 아름다웠다. 저 여유로움을 누가 감히 따라할 수 있을까?
아주 호들갑스럽게
- 와 진짜 멋있지 않아? 정말 실존 인물들로만 구성했다더니 하나하나 진짜 신경 썼네!
- 다 실제 인물이야?
처음에 나왔는데 넌 왜 모르는 거냐?
- 응.
- 저 사진은 누가 준 거지?
- 그 검사가 아닐까?
- 맞다! 자기가 한 장 가져간다고 했어 그거 신문사에 보냈나보다.
- 그랬어?
때론 내가 놓치는 것을 아들이 본다. 엄마라고 다 옳지 않고 아들이라고 다 놓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음에도 이준익을 보면 좋겠다고 재빨리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 흠.....질문은 안 받겠다 이거구만! 저기요, 물을 건 다 물어봤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