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아버지께서 우리 다섯 남매를 모두 부르셨다. 코로나 발생 후에는 찾아뵙겠다고 해도 웬만하면 오지 말라고 말리던 분이었는데, 어쩐 일인가 싶었다.
폐암 말기 아버지의 몸무게는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다. 평소 60Kg대의 몸무게가 작년 가을 서울로 병원을 다니실 때쯤 50Kg대, 지금은 40Kg대로 내려앉았다. 그야말로 이제 뼈만 앙상하신 모습이다. 손이 많이 떨려서 손톱도 제대로 깎기 어려워하셨다. 내가 도와드렸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아들이 어렸을 때는 아들을 뒤에서 안고 손톱 발톱을 깎아주곤 했는데, 아버지를 품에 안기는 어렵다 보니 자세가 영 어정쩡했다. 손이 떨리는 아버지와 어설픈 딸내미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꽤 긴 시간을 실랑이한 끝에 겨우 손톱 발톱을 깎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나마 정신이 온전할 때 삶을 정리하고 싶으셨나 보다. 자식 다섯을 모두 불러 유산 문제를 정리하시려고 부르신 거였다. 집에 있던 물건들도 하나둘씩 정리하고 계셨다. 혼자 남겨질 엄마를 위해 집 명의도 변경하셨단다. 그야말로 아버지는 이제 죽음만 기다리고 계시는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아버지의 지금 심정은 어떠실까? 감히 가늠하기 어렵다. 오랜만에 자식들이 다 모인 자리라서 그런지 표정은 밝아 보이셨다. 평상시보다 그날따라 유독 상태가 좋으신 거라고. 가끔 통증이 심할 때는 나 좀 죽여달라고 엄마에게 애원을 하시기도 한단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최대한 아버지가 고통을 덜 겪으시며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시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한참을 집안 곳곳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재작년 이사를 하면서 많은 물건들을 정리했고 최대한 간소하게 살자고 다짐했음에도 여전히 집에는 많은 물건들이 보인다. 사는데 왜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필요한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집안의 많은 물건들이 내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물건들 때문에 내가 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집에 있던 책들도 많이 정리했고, 이제는 전자책만 사고 있다. 집안에 장식품들도 두지 않기로 했다. 해외여행을 가더라도 부피 나가는 물건은 사지 않기로 다짐했고, 추억용으로 마그네틱 한 두 개 정도만 사고 있다. 냉장고 사이즈도 줄였다. 냉장고가 크면 먹지도 않을 음식들만 더 쌓이는 것 같아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에는 많은 물건들이 있다. 아직 삶을 정리하기엔 이른 나이지만 앞으로는 더 간결하게 살고 싶다.
아버지를 뵙고 와서 며칠간 우울감을 떨쳐 버리기 어려웠다. 아버지와의 이별이 멀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자꾸 내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아버지에 비해 내게 남은 시간이 많다는 것만 제외하면 어차피 나도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은 동일하지 않은가 싶었다.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세트처럼 찾아오는 삶의 허무감이 나를 힘들게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죽어야 할까. 아버지를 보며 내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나, 생각만 많아질 뿐 생각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다. 풀기 어려운 수학 문제를 앞에 두고 며칠째 끙끙거리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