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시작한 후 바뀐 나
다시 돌아 온 서울
가수 싸이가 ‘오빤 강남 스타일’을 외치며 한류 열풍이 거세지던 2012년 여름. 달리기로 버티던 1년간의 길고도 짧은 스페인 타지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혼자서 일주일에 2~3회씩, 비교적 주기적으로 달리곤 했다. 그 사이 집 앞 북한강가에는 편도 5km 정도의 산책로가 생겼고, 학교에는 러닝 동아리가 생겼으며, 모 스포츠 브랜드에서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오프라인 러닝 이벤트도 열리고 있었다.(그전엔 없었던 것이었는데 어쩌면 내가 몰랐던 것이었을 수도). 인간은 객관화가 중요하다고 했던가? 멀찍이 떨어져 있다 돌아온 한국 사회는 1년 사이 상당히 달라져 있었지만, 그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기존에 오가던 익숙한 공간들을 바라보는 내 시각이었다.
한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는 지하철이 승강장에 도착하면 자신이 내릴 문을 직접 여는 방식이다. 각각의 승, 하차의 문에는 버튼 또는 레버가 있어서, 승강장에 차량이 멈춰 서면, 버튼을 직접 눌러 내린다. 문 앞에 승, 하차하는 사람이 없으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 만약에 당신이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열리지 않은 문에 승차하고자 하면, 승강장 쪽에서 버튼을 누르면 열린다. 처음에는 이런 시스템이 적응이 안 되어 안 열리는 문을 기다리다가 하차 시점을 놓쳐 다음 역까지 간 적도 있고, ‘왜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었지?’하며 불평도 하곤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이 건 하차하는 사람들이 먼저 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하차 전 문 앞에서 차량이 멈추는 걸 기다리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먼저 내리고, 승차하는 사람들이 그 열린 문으로 뒤이어 탑승하게 된다. 이 얼마나 합리적인 시스템인가? 우리가 매일 탑승하는 지하철 안내 방송으로 ‘차량의 문이 열린 후, 하차 후에 승차하시기 바랍니다’가 수도 없이 나와도 하차 전에 열린 문으로 탑승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평소엔 그러려니 했던 상황이 스페인을 다녀온 후 이 점이 참 불편하게 여겨졌다. 평소에는 문제없이 다니던 길이 눈 감고 걸어보면 장애물 천지고, 정전이 나면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했던 많은 것들이 사용할 수 없어 불편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것만 있다는 걸 강조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다시 돌아온 서울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달릴 수 있는 장소가 무한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점이다.
달리기 천국, 서울
서울은 동에서 서로 한강 물줄기가 시원하게 지나가고 있으며, 그 강변 따라 편도 40km에 이르는 한강변 산책로가 뻗어져 있고, 그 큰 물줄기에 합류하는 수많은 하천변에도 산책로가 거의 다 이어져 있다. 그리고 각 거점별로 크고 작은 공원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서울숲, 보라매공원, 올림픽공원, 북서울 꿈의 숲, 평화의 공원, 양재 시민의 숲, 여의도공원, 어린이대공원, 석촌호수… 등 우리 주변에는 산책하고 달리기 좋은 공간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조금 더 안전에 주의를 기울어야겠지만, 서울 시내 도보 따라 달리는 황홀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북미나 유럽에서는 ‘시티 런’이라고 불리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운동 방식이기도 하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와 이렇게 달릴 수 있는 곳이 많았다니…’ 하며 놀랍기 그지없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후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하고 10년, 그중에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많이 달린 코스를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꼽는 코스가 있다.
남산
남산 화면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으로 몇 가지 꼽자면 애국가 영상에서 나오는 소나무가 가득한 산, 남산타워, 케이블카 등이 있을 것이다. 한류 드라마 속 남녀 주인공의 주된 데이트 코스이기도 하여, 외국인들이 한국에 관광 왔을 때 일 순위로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남산은 달리기를 즐길 수 있는 장소로서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남산, 서울의 심장
남산은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있으며, 서울 어느 곳에서 와도 전철, 버스, 자가용으로 접근이 용이한 사통팔달의 입지를 갖추고 있다. 2014년 마음 맞는 러너 친구들과 함께 러닝 크루(running crew: 러닝 동호회를 의미하는 현대어)를 결성하여 매주 1회 정기적으로 러닝 모임을 가져왔는데, 서울 내에서 혹은 수도권에서 학업, 근무를 마치고 오는 그루원들이 모이기에 가장 용이했다. 재밌게 표현하자면, 서울의 중심부라는 ‘상징성’ 때문에 누구에게는 가깝고, 누구에게는 멀다는 불평을 상쇄시킬 수 있었고, 실제로도 여러 명이 모여서 스트레칭을 할 수 있는 넓은 광장(국립극장 앞), 가끔은 끝나고 뒤풀이를 할 수 있는 근처 식당가(동대입구역 근방)까지 모든 필수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울의 폐, 남산
남산에는 남산 순환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일부는 시내버스만 지나갈 수 있는 차도와 맞닿아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코스는 자동차, 자전거도 접근이 불가능한 오직 걷는 이와 달림이 많이 통행이 가능한 코스가 산 중턱부터 남산 정상까지 이어져 있다. 도심에 위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소음과 스트레스에서 격리되어 있으며, 봄, 여름, 가을, 겨울 날씨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끼며 달릴 수 있는 곳이다. 벚꽃과 개나리가 만발하는 봄을 지나,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막아 주는 산책로 위 30년 이상의 수령을 자랑하는 나무의 녹음, 한껏 빨갛고 노랗게 반짝이는 단풍 든 가을을 지나,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소나무들의 절경까지… 남산을 달리는 매 순간이 항상 새로웠고, 항상 특별했었다. 달리기를 오래 하다 보면 지루할 수도 있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경우도 다반사인데, 그때마다 남산에 가면 새로운 영감을 채우는 에너지가 가득하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트랙
남산 산책로는 크게 두가 지로 나뉜다. 아스팔트 포장이 된 ‘남산 산책로(북측 산책로+남측 산책로)’와, 비 포장된 흙 길로 연결된 ‘남산 둘레길’. 일반적으로 남산에서 달린다는 의미는 남산 산책로 그중에서도 북측 산책로를 왕복으로 달리는 것이다. 왕복 약 7km 정도인데 더 나아가 왕복 코스가 지겨운 경우에는 북측과 남측 산책로를 연결하여 남산 한 바퀴 약 7km를 원점회귀 방식으로 돌기도 한다. (이를 남산 1회전이라고 표현한다.) 국립극장 뒤 어귀에서 시작하여 남산 케이블카까지 이어진 북측 산책로는 남산 중턱의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완만한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하여 굽이굽이 남산 둘레를 달릴 수 있다. 도심 방향 쪽으로는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데, 북으로는 명동, 동대문의 반짝이는 도심이, 남으로는 용산 너머에 한강을 가로지는 다리들과 높은 마천루들 그리고 그 뒤에는 높은 관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오르막을 오르며 턱 끝까지 차오른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도 쉼 없이 바뀌는 풍경들이 나를 응원하는 느낌도 느껴지고, 도심의 매연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달리기에 집중할 수 있는 자연의 코스는 달리기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러너들의 성지
전 세계적으로 마라톤/러닝 문화가 일찍이 발달하여 ‘러닝 선진국’이라 불리는 곳들은 여러 선결 조건이 있는데, 러너들이 달리기 좋은 코스를 갖추고 있으며, 도시 어느 곳에서도 접근성이 용이한 공원이 그중에서도 제일 첫째라고 볼 수 있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 도쿄의 요요기 공원, 런던의 하이드파크, 베를린의 티어 가르텐, 시카고의 그랜트 파크, 바르셀로나의 바르셀로네타 해변, 파리의 뛸르히 가든… 각 도시를 대표하는 러너들의 성지이며, 평일 이른 오전이나 저녁 그리고 주말에는 언제든 삼삼오오 모여 달리는 러너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서울은 어떨까? 서울의 남산은 예부터 서울의 달림이들의 성지 같은 곳이었다. 주말 새벽부터 형형색색의 러닝복을 갖춘 러너들이 모여 다양한 마라톤 클럽, 러닝 동호회의 모임의 장이 되었고, 나이, 성별 상관없이 마주 달리는 러너들을 응원하며, 달리다 보면 러닝에 대한 에너지가 한껏 고취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서울시와 남산공원 측에서도 러너들을 위하여 러너들의 짐을 보관할 수 있는 보관소를 무료로 운영하고 있고, 최근에는 최신식 샤워시설도 완비되어, 땀 흘린 러너들이 출근 전, 퇴근 후에도 부담 없이 운동할 수 있는 조건도 조성되었을 정도이다.(단, 지금은 코로나로 인한 정부 지침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운영이 중단되었다.)
‘남산을 달린다’는 의미는 이렇게 다양한 의미에서 경험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른 장소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물론, 오르막 내리막이 적절히 반복되는 코스이기 때문에 훈련 효과도 배가되는 최고의 트레이닝 환경도 갖추고 있다.
남산을 아직 달려보지 않은 분들에게 이런 얘길 드리고 싶다.
‘남산을 안 달려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달린 사람은 없다’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