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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덕연 Jan 04. 2022

달리기의 시작

달리기 취미 11년, 그 시작은 작고 소박했다.

‘달리기 언제 시작하셨어요...?’


달리기가 취미라는 걸 알게 된 분들에게서 가장 처음으로, 아니면 적어도 두 번째 질문 중에 하나인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나는 아직도 머뭇거리곤 한다.

사람은 태어나서 네 발로 기어 다니기 시작해서, 두발로 일어서서 걷고, 달린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자 인생주기의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근데 언제부터 달렸냐 하니.

출근 시간, 회사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전철의 플랫폼 진입 알람 소리에 달리기도 하고, 출발하려고 문을 닫으려는 버스에 타기 위해 달리기도 한다. 남은 숫자가 한 자릿수로 떨어지고 있는 푸른 등이 깜박이는 신호등을 보면서 건널목을 달려서 건너기도 하고, 무서운 강아지가 달려와서 달릴 수도 있겠다. 일상생활의 달리기는 셀 수 없이 많다. 본능적이며, 의무적인 달리기.

하지만, 질문을 하는 사람이 물어보는 이유는 당연히 그것이 아니겠지. 나도 당연히 알고 있다. 가끔은 농담으로 ‘저는 유치원 가기 전부터 달렸지요.’라고 아이스브레이킹을 하기도 하지만, 질문을 건네는 분의 눈빛으로 하여금 나의 진지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낌새를 채면, 조금 더 깊이 있게 얘기를 꺼낸다. 상대방이 물어본 의미를 조금 더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신이 의식적으로, 자발적인 의지를 갖고, 주기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한 건 언제예요?’

하지만, 이 대답을 하기엔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10년 전’ 또는 ‘20년 전’

하나는 5분짜리 간략한 아이스 브레이크용, 그리고 2박 3일은 너끈히 채울 수 있는 구구절절, 한 러너의 달리기 역사.


선택지 1. ‘저는 달리기를 20년 전에 시작했어요.’


체육시간하면 어떤 기억을 떠오르는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보통은 축구공 하나 던져 주고, 남자들은 팀을 나눠 축구를 하고, 여학생들은 모서리에서 피구나 발야구를 시키고, 그마저도 체육활동을 싫어하는 학생 몇 명은 아프다는 꾀병을 부리며 운동장 옆 스탠드나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이 있을 것이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앞두고는 자율학습 시간으로 대체되거나..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육상부가 있었고, 수영부가 있었다. 소위 말해 체육에 진심(?)인 학교였다. 교내 육상대회, 줄넘기 대회, 구기 대회, 단축마라톤 대회, 수영 대회 등 매달 학교 전체 단위의 행사가 있었고, 체육 시간에 테니스, 핸드볼, 창던지기, 게이트볼 등 체육 교과서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종목의 운동을 실습했으며 여름철 내내 체육수업은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 수업으로 진행되었을 정도다.

특히, 교내 단축 마라톤 대회를 다가오면, 전교생은 대회 모드(?)로 들어간다. 대회 한 달 전부터는 체육시간 50분 내내 달리는 것이다. 체육 선생님이 운동장의 모서리에 의자를 두고 앉아 계시고, 학생들은 운동장을 크게 빙 한 바퀴 돌 때마다 팔뚝에 도장을 찍는다. 그걸 10바퀴 즉, 팔뚝에 도장이 10개 찍히면 교실에 들어가는 식인데, 크게 돌면 약 500m씩이라고 가정하면 약 5km를 다 달려야 시원한 교실에 들어가 쉴 수 있다. 빨리 돌면 빨리 들어가 쉬고, 천천히 걸으면 그만큼 쉬는 시간은 적은 것이다.

전 학년이 동일하게 경쟁하는 대회에서 갓 입학한 중학교 1학년 때는 열심히 뛰었다고 해도 덩치 큰 형들한테 상대가 되지 않았었다. 사춘기 시절, 며칠 밤만 자고 일어나면 키가 쑥 자라는 시기이다.

어느새 나는 이제 중학교 3학년, 그 사이 나는 키가 30cm 이상 훅 자라 있었고, 이제는 잘 달릴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대회에서 3등까지 주는 유리 트로피가 어린 나에게는 너무 멋져 보였다. 그 트로피가 갖고 싶었다. 나는 마라톤 대회에서 이기고 싶었다. 하지만 달리기는 공부처럼 벼락치기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나이였나 보다. 일주일에 2번 정도 체육시간에 달리는 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해 질 녘 집 앞 공원에 나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당시 집에서 자전거로 10분 거리의 보라매 공원은 제법 큰 나무들도 많고, 호수에, 달리기 트랙에,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다만, 페이스도 모르고, 주법이란 것도 모르던 어린 나는 단순한 목표를 세웠다. ‘일주일에 3번, 공원 5바퀴’ 훈련 측정법도 단순했다. 그 당시 손목의 초 시계를 켜서 5바퀴를 도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를 체크해서, 지난번보다 기록이 나아지는 것이었다.

한 여름, 아무리 해가 이미 졌다 해도, 낮 동안 달궈진 아스팔트 위를 500m만 걸려도 온몸이 땀에 푹 젖는 그 계절을 내내 달렸던 키가 160cm에도 미치지 못하는 까까머리 작은 녀석은 한 달 뒤 7km의 대회 코스를 돌아 첫 번째로 골인지를 통과하였다. 역대 최고 기록이라는 담임 선생님의 미소가 맞아 준 그날 오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빛나는 크리스털 트로피를 받아 집에 들어가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트로피도 좋은데, 나는 그냥 달리기가 좋아.’


선택지 2. ‘저는 달리기를 10년 전에 시작했어요.’


몇 십 년 만의 무더위로 압축되는 올여름. 장맛비도 더위에 주춤하고, 에어컨과 선풍기 판매는 사상 최대를 기록하였다는 폭염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자리하게 될 2021년으로부터 10년 전, 2011년 여름은 내 인생에 가장 뜨거웠던 기억이자 그 이후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계절이었다.

제대 후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던 나는 이중 전공으로 스페인어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언어를 새로 배운다는 건 큰 모험이었으나, 즐거운 도전이기도 했다. 여러 여행 소개 TV 프로그램과 CF, 다양한 여행 정보를 통해 불어온 스페인 여행 열풍으로 인해, 지금은 유럽여행하면 스페인을 쉽게 먼저 떠올릴 수 있지만,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일반인의 머릿속에 스페인으로 떠올리는 무언가가 많지 않은 시절이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젊은 남자들은 ‘바르셀로나의 메시’, ‘레알 마드리드의 호날두’를 떠올렸고, 조금 더 관심 있는 어르신들에게는 ‘투우’, ‘플라멩코’ 정도가 떠오르는 정도였다. 내가 스페인어를 배운다고 했을 때, 그리고 유학을 위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떠난다고 했을 때, 주변인들로부터 제일 먼저 돌아오는 질문도 나에게 달리기의 그것과 비슷했다.

‘왜 스페인어 배웠어요?’

바르셀로나는 비유하자면 한국의 부산과 비슷하다. 북쪽으로 산이 둘러싸고 있는 도시가 남으로는 긴 해변을 따라 지중해와 맞닿아 있다. 높은 산이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주어 겨울에도 춥지 않고, 남유럽 지중해의 여느 도시 마을처럼 1년 내내 온화하고 따뜻한 기후를 유지하고 있는 도시이다. 환경이 그러하니, 예부터 예술이 발달하고, 해상, 유상을 가리지 않는 다양한 스포츠가 발달하였다.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등 걸출한 예술가들의 터전이었으며, 가우디의 작품이 시내 곳곳에서 숨 쉬고 있다. 라파엘 나달(테니스), 파우 가솔(농구), 루이스 해밀턴(F1) 등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열광하는 Primera Liga(스페인 프로 축구)의 유명 축구 선수들까지… 문화적으로 화려하게 꽃피우는 도시이다.

거기에 더하여, 도시 전체가 거대한 공원과 같아, 커다란 공원들이 곳곳에 위치해 있고 걷기 좋은 산책로가 해변부터 산까지 도시를 관통하여 잘 닦여 있다. 거의 모든 도로에 별도로 관리되고 있는 자전거 도로망도 세계에서 최고로 손 꼽힐 정도다. 환경이 문화를 만드는 것일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이 참 많다.

뜨거운 여름을 지나 가을과 겨울을 향하는 유학 생활이 다소 로즈 해 질 무렵이었다. 집을 떠나 먼 곳에서 혼자 지내는 경험도 처음이거니와, 우리말로 배워도 어려운 수업 들을 숨 가쁘게 따라가느라 학업 스트레스도 상당했고, 한국 음식도 슬슬 그리워지던 시기였다. 우울증까지는 아니어도 외로움과 우울함을 느끼고 있던 어느 날, 기숙사에서 5분 거리면 나갈 수 있는 해변을 따라 달려 나가 보았다. 평소에 항상 다니던 길이 아닌 골목길을 따라가기도 하고, 안 가봤던 공원을 통해서 달려가기도 하니, 도시의 새로운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샌드위치 가게도 찾았고, 먹음직스러운 과일을 예쁘게 진열한 과일 가게도 발견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은 시간대 같은 코스에서 자주 마주치는 다른 러너들과 인사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학교-기숙사-학교-기숙사의 동선을 반복하던 지루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식고 있던 도시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리다 만나는 Barceloneta 해변의 바람은 얼마나 시원한 지.

문득 어린 시절 매일 5바퀴씩 보라매 공원을 달리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참, 나 달리기 좋아했었지.’

그렇게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비로소’ 달리기 시작한 건지도 모른다. 트로피 때문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보다 빨리 골인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에겐 바르셀로나 도시 전체가 재밌는 ‘달리기 놀이터’가 되었고, 그냥 달리는 자체가 즐거웠다. 아침/저녁, 그리고 또 주말에 새로운 동네, 낯선 장소를 향해 두 발로 달리면서 유학 시간의 나머지를 버틸 수 있는 힘을 만들어 주었다. 마음의 힘뿐만 아니라 체력까지도.

동네 마라톤 클럽에 가입하여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고, 10KM 대회에도 나가 달렸다. 1994년 황영조 선수가 우승한 몬주익 언덕을 내달릴 때의 울컥함이란.

1년 후 한국에 다시 돌아온 내가 최우선적으로 한 일은, 달리기 동호회를 찾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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