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를 원하지 않으면 영화를 보고 나서 보세요.
2019년에 나온 영화 <조커>를 재미있게 봤다. 조커2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 개봉했다고 해서 만사를 제쳐 놓고 보러 갔다.
조커2의 제목은 조커: 폴리 아 되(Joker: Folie a Deux)로 정신병적 증상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조커의 광기가 리(레이디 가가)를 움직였고, 대중들도 조커처럼 만들어 버린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기대했던 조커의 광기가 사라지면 사람들의 지지도 사라질 수 있다는 뜻)
조커1이 조커의 어두운 탄생을 그렸다면, 조커2는 조커 내면의 사랑을 다뤘다고 볼 수 있다. 조커1에서 알 수 있듯이 조커가 살인을 하게 된 배경에는 세상이 그에게 준 증오가 자리 잡고 있었고, 조커2에서는 사랑의 힘으로 변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커의 증오도 결국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자아가 갈라진 사람들은 그 자아를 붙이기 위하여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조커를 보면서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거나 폭력적으로 대할 때 갈라진 영혼으로부터 더 깊은 증오가 솟아나고, 깊어진 증오는 파괴적인 행동을 낳게 된다. 파괴적인 행동을 누그러뜨리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사랑이고, 욕설이 아니라 노래임을 조커2는 보여준다.
조커1의 영웅 탄생과 같은 모습을 기대했다면 노래만 나오는 조커2를 보면서 사람들은 실망할 수 있다. 노래를 연출하기 위해 레이디 가가를 썼는지, 레이디 가가가 참여하면서 노래가 많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노래를 통해 조커의 내면을 보여준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계속 노래를 부르던 조커가 정작 리가 떠날 때는 노래를 그만 부르라고 한 것을 볼 때 노래가 곧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조커는 파괴가 아니라 사랑을 원했고 리를 원했지만, 리는 아서 플렉이 아닌 광기의 조커를 원했던 것이다. 아서 플렉이 더 이상 조커가 아니라고 하자 조커를 원했던 리는 아서 플렉을 떠나게 되고, 리가 떠난 조커는 의미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죽게 된다. 대중들에게도 조커가 없어진 아서 플렉은 필요 없다고 느껴질 만했다. (좀 허무하긴 했다.. 실제로 죽을 줄이야..)
영화를 통해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런 것들이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진실을 좋아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 진실을 마주하여 환상이 깨지게 되면 그것을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것도. 아서 플렉이 대중의 지지를 받은 것은 대중이 원하는 조커라는 환상의 캐릭터를 만들어 냈기 때문. 그리고 조커라는 환상이 없어져 버리자 그걸 없앤 아서 플렉을 죽이는 것으로 대중의 인식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조커는 원래 없었고, 조커는 그들이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었고, 사람들은 그런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조커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불합리한 세상을 보며 증오를 키운 유리 같은 연약한 마음의 소유자’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세상을 향해 실제로 행동을 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그 사람을 영웅화, 환상화하고 따르게 된다는 것이 영화 <조커>의 메인 배경인 것 같다.
기괴한 모습의 조커 분장은 실제로는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하려고 노력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며, 악당이 아니라 사람들의 환상을 실현해 주는 일종의 ‘정신을 살짝 놓은 대리자’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