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썰티마커 SALTYMARKER Oct 29. 2024

교수의 재계약


교수도 일종의 계약직이다. 전임교원이라도 조교수, 부교수는 몇 년 단위로 계약서를 쓴다. 비정년제보다 계약 기간이 조금 더 길고, 좀 더 안정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처음 임용이 되어서 OT를 간 날이 생각이 난다. 나는 그냥 설명을 듣는가 보다 하고 갔는데 갑자기 한 사람씩 불러서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있어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미묘한 분위기였다. 계약서는 이미 다 프린트되어 있고, 호봉은 이미 다 산정이 되어 있고, ‘이거 맞지? 사인해.’라는 학교 측 태도를 갑자기 맞닥뜨리니 당황스러웠다. 마치 어디서 일꾼을 데려와서 사인을 강제로 시키는 것처럼 갑과 을의 관계였다. 말은 계약이지만 명령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과가 달라지지 않더라도 명색이 계약서인데 한마디라도 의사를 물어줬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이번 주. 나는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재계약임용 대상자 통보’ 메일이었다. 메일 안에는 근무기간 만료 통지서, 심사신청서, 인사규정과 함께 포기각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생각한 시기보다 조금 빨랐기에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파일을 열어서 읽어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근무기간이 언제 만료가 된다. 재임용을 받고자 하면 통지를 받은 날로부터 15일 이내에 심사신청서를 제출해라.’가 요지였다. 그리고 한 사람씩 파일이 온 게 아니라 대상자 전체의 통지서가 들어가 있는 수십 페이지의 한글 파일이 떡하니 왔다. 어떤 교수가 근무 만료가 되었는지 알게끔 하려는 의도일까, 아니면 개별적으로 만들기 귀찮았던 것일까.


그것도 기분이 이상했지만 포기각서를 열어보고 기분이 더 이상했다. ‘재계약임용 심의 신청을 포기하는 각서를 제출한다.’고 해서 이름을 적게 했다. 심사신청서와 포기각서를 나란히 놓으니 갈림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15일 안에 결정을 하라고 하였다.


당연히 정년까지 다닐 생각으로 들어온 사람은 별생각 없이 기간을 연장하는 느낌으로 신청서를 내겠지만, 교수 일을 하면서도 여러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다시 결정의 시간을 갖는 느낌이다. 내가 여기를 계속 다녀야 할까? 아니면 여기까지만 할까? 의 고민 말이다. 그리고 15일이라는 시간은 의외로 짧았다.  

    

마음속에 사직서 하나쯤 품고 다니지 않는 직장인이 있을까마는, 막상 결정의 기로에 놓이면 고민이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원래 예정되어 있던 회식이 있었는데 가는 길에 비가 왔다. 운전을 하면서 가는데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라디오에서는 Bee Gees의 Holiday가 나오고 있었다. 노래가 나오자 기분이 바로 그 노래에 스며들었다. 내리는 비와 당시 나의 고민과 상황들, 벗어날 수 없는 기로들에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왜 이렇게 마음을 울릴까 생각을 해 보니 그 노래는 바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던 지강헌이 요구했던 노래였다. 낭만적인 바람막이 하나 없이 이 사회에서 목숨을 부지하기에는 너무나 살아갈 곳이 없었다는 그. 마지막은 내 뜻대로 살겠다며 노래를 듣고 삶을 마감했던 그였다. 당신은 휴일과 같다며 시작하는 노래. 지강헌이 노래의 가사를 잘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사가 그런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아 소름이 돋을 정도다.      


어쨌든 그날 나는 회식에서 술을 먹지 않았다. 술을 먹지 않고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에게 휴일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 나만 모르는 그 어떤 것이 있는 것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고통이 필요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