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사람에겐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는데요, 기침과 가난과 사랑. 숨길수록 더 드러나기만 한 대요.”
영화 시월애를 보다가 이 대사를 마주했을 때, 나의 방점은 기침도 사랑도 아닌 ‘가난’에 찍혔다. 작가는 기침이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듯, 가난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듯, 사랑이란 감정이 얼마나 드러나기 쉬운지에 대한 통찰을 담으려 했겠지만.
‘가난’은 감추려야 감출 수가 없어서 만천하에 드러나고야 마는 성질을 지녔음에도 내가 아닌 타인의 가난에 대해서는 도저히 제대로 안다고 할 수가 없다. 제삼자의 가난을 글이나 영상으로 본다고 한 들, 가난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누군가는 ‘없이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며 가난의 낭만에 대해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난은 절대 낭만적이지 않다. 당사자에게 가난은 형용할 수 없이 처절한 것이다. 오죽하면 ‘가난이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무등을 보며 中)’ 던 서정주 시인에게, ‘가난을 한 편의 시와 바꾸어 한 그릇 밥과 된장국물을 마시려는 저 주린 입을 모독하지 말라(가난 中)’고 문병란 시인이 질타하지 않았던가.
그날 엄마는 병원에서 열 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난데없이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셨다. 어쩌다 그 이야기가 나왔을까. 언젠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탔는데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어서 다시 버스에서 내려서 다섯 정거장이나 되는 길을 걸어오셨다고 했다. 50대 중년여성의 지갑에 버스표만 없었던 게 아니라 그 흔한 천 원짜리 한 장도 없었다니, 벙쪄 있는 나를 향해 엄마는 옛날에는 더 먼 길도 걸어왔다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막내가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어린 시절이었나, 살림이 너무 어려웠던 엄마는 뭐라도 벌어야지 싶어 아침 일찍 뒷산에 가서 나물 한 소쿠리를 캐다가 시장에 팔기로 하셨단다. 아직은 젊고 수줍음이 많았던 엄마가 나물을 캐다가 시장에서 직접 팔아야겠다고 마음먹기까지 몇 번이나 망설였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가까운 거리의 장에는 아는 지인들이 많아 엄마를 알아보고 걱정할까 봐 먼 중앙시장까지 나물을 이고 가셨다고 한다. 하루종일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나물을 사주지 않아서,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나 어째야 하나 망설이던 찰나. “어차피 이제 장도 파할 시간이니 집에 가져갈 거면 나한테 떨이로 이천 원에 넘기슈.”라며 누군가 흥정을 걸어왔다고 했다. 엄마는 기가 찼지만 빈손으로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싶어 이천 원에 나물을 몽땅 넘기고 보니, 얼마 벌지도 못했는데 집에 갈 차비를 쓰는 것이 아까워 해가 저물 때까지 그 먼 길을 걸어오셨다고 한다. 집에 겨우 도착하니 첫째 아이가 하는 말 “엄마, 나 문제집 사야 돼. 이천 원만.”
참,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3녀 1남의 아이 넷을 키워내야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은 일찍이 몸이 아파 제대로 된 가장 노릇을 하지 못했다. 엄마가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남들은 고생스럽게 일했어도 나이가 들면서 살림이 점차 나아졌지만, 아이넷을 키우며 아빠의 병원비까지 감당해야 했던 엄마의 허리는 펴질 날이 없었다. 500원짜리 두부 한 모로 여섯 식구의 한 끼를 감당했던 때였다. 더 이상 아낄 돈도 없어서 가계부의 필요를 못 느낄 정도였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그림 그리는 솜씨도 좋고 글 쓰는 재주도 뛰어난 분이셨다. 아줌마의 억척스러움보다는 오히려 문학소녀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릴 것 같은, 단정한 치아를 한 손으로 가리고 웃는, 언제나 소녀 같은 분이셨다. 나를 낳기 전 사진 속의 엄마는 비싼 옷을 입지 않아도 작은 브로치 하나, 단정하게 맨 스카프 하나로, 옷 태가 나는 멋쟁이셨다. 그랬던 엄마가 우리 사 남매를 낳고는 추운 겨울에도 국방색의 얇은 단벌 외투를 입고 다니셨다. 그나마 그 옷도 누군가 입던 것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어려운 가정을 돌보다 보니 본인을 위해 변변한 외투 하나도 사 입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나면 안 그래도 왜소한 몸을 오들오들 떨고 계셨지만, 언제나 소녀같이 웃어주던 엄마.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는 70년대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구슬꿰기 알바, 호두까기 알바 등을 집으로 가져오셨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생계를 어떻게든 책임져야 했던 엄마의 속은 타들어 갔겠지만 우리 4남매는 놀이처럼 구슬을 꿰고 호두를 깠다. 몇 날 며칠을 아이들과 함께 앉아서 만들어다 납품하면 구슬이 잘 못 꿰어졌네 호두가 안 이쁘게 까져서 상품성이 떨어졌네 하며 처음 약속과는 달리 일당을 깎고 깎아 몇 천 원을 겨우 지워주었다. 그 (악덕) 사장님 옆에 서 있던 엄마의 어깨가 유난히 작아 보이던 기억.
초등학생 때는 반장, 부반장을 맡아해 왔지만 중학교 진학 후에는 ‘우리 집 형편에 임원이 되면 엄마가 더 힘들겠구나’ 싶어 반장선거에 나가라는 친구들의 권유를 만류하고 늘 서기를 맡아했다. 그래야 엄마가 학교로 오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남들 다 하는 보충수업비를 내기도 빠듯한 형편에 수학여행 고지서를 내미는 게 염치가 없던 시절, 당연하게도 사교육은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1분 1초가 아까운 수험생 시절, 또래 아이들이 봉고차를 타고 등하교를 했지만,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던 나는 방송반 일로 시간이 맞지 않아 봉고차를 타지 않던 친구와 단 둘이 걸어 내려와 버스를 탔다. 그 하굣길은 유난히 길고 쓸쓸했다.
그래도 엄마는 한 번도 인색한 적이 없었다.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 날에는 꼭 책 한 권을 사서 손 편지를 써 주셨고, 생일날에는 오래된 쌀가루로 떡을 쪄 주셨다. 철없던 나는 매일매일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와 시끌벅적하게 놀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미래의 언젠가 엄마를 호강시켜 드려야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만 할 뿐이었다. 엄마는 늘 뭐든 할 수 있는 내가 부럽다고 하셨다. 뭐든 잘 해낼 거라고 하셨다. 늘 나를 믿고 기다려 주던 온전한 나의 편. 그 시절, 그 불편하고, 쓸쓸하고, 쾌쾌하고, 습한,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모자란 그 가난 앞에서도 엄마의 넘치는 사랑 덕분에 나는 쪼그라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첫 월급을 타면 가장 먼저 엄마의 가방을 바꿔주고 싶었다. 명품 가방까지는 못되더라도 중년 여성이 맬 법한, “우리 딸애가 사줬어”하고 자랑할 법한 그런 가방을. 그 가방 속 지갑에 만 원짜리 빳빳한 지폐들을 넣어드리고 싶었다. 그런 생각만 앞섰기 때문일까, 대기업 입사 후 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어떻게든 빨리 경제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에 나의 꿈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진로 선택이었다 극 I의 내게 극 E들이 모여 있는 영업직에서의 적응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쉬는 날 집에 누워 있으면 엄마가 등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괜찮냐고 회사 생활은 어떠냐고 물어보셨다. “그냥 그래, 아직 잘 모르겠어.”변명 같지만 그런 대답밖에 할 수가 없었다.
신입사원 연수를 겨우 마무리하고 제대로 된 첫 월급을 탔던 날, 시내의 백화점에 가서 악어무늬의 가방을 한참 골랐더랬다. ‘이렇게 향수 냄새 가득한 곳에서 쇼핑을 다하네. 그래 꼭 내 적성에 맞지 않으면 어때, 선물도 사고 용돈도 드릴 수 있는데’하고 기분 좋게 취해 집에 돌아왔던 그날, 엄마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길로 엄마는 2주 만에 원인 모를 패혈병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지금도 가끔 거스름돈으로 받아둔 지폐와 동전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걸 볼 때면 옛날 생각이 난다.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없어서 먼 길을 걸었다던 엄마 생각. 별 계획 없이 마트에 가서 아이가 먹고 싶다는 걸 장바구니에 차고 넘치도록 담다가 문득, 500원으로 한 끼를 책임져야 했을 엄마 생각. 그리고는 또 따뜻한 자동차 시트에 앉아 옷자락이 젖은 채 걷고 있는 누군가를 볼 때 한 번씩, 밥보다 더 비싼 커피를 마실 때 한 번씩, 철에 맞는 옷을 사 입을 때 한 번씩. 당신을 닮은 슬픈 것들을 볼 때는 물론 당신의 삶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던 너무 멋지거나 좋은 것들을 볼 때에도 한 번씩. 뜬금없이 터져 나오는 기침을 막을 길 없듯이, 속수무책으로 당신이 터져 나왔다.
그때 조금 더 일찍 돈을 벌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조금 더 엄마한테 살갑게 이야기했더라면 어땠을까. 일을 마치고 온 엄마가 편히 쉴 수 있게 저녁을 차려놓고 설거지통을 깨끗하게 비워두었더라면 어땠을까. 잘못했던 일들이 후회될 때마다, 고생만 하셨던 기억에 마음이 저릴 때마다, 그때의 어느 날로 돌아가서 네가 그럴 때가 아니라고 과거의 나에게 호통을 쳐주고 싶었다. 아이들 반찬값으로, 남편의 병원비로, 시도 때도 없이 불어나던 대출이자로 발을 동동 거렸을 당신에게 계좌이체를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의 나에게는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도 없을 것 같은 이 지폐들을 모아다가 당신의 지갑에 넣어두고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다.
그렇게 숨길 수 없다던 가난을 숨길 수 없는 사랑으로 덮어주셨던 엄마가 가고 나서야. 이제는 가난을 애써 숨길 필요가 없게 여유로워졌는데. 당신이 사무치게 그리워져서, 차라리 가난했던 그때 그 시절 -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했던 내가 그립다고 하면. 엄마, 나는 가난을 잘 모르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