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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호 Apr 15. 2024

[중용 37. 영원한 제국]

- 공자가 주(周) 나라를 따르고자 한 까닭은?

【28-04】 107/130 덕과 지위가 함께 해야 예악을 만든다. 

비록 그 지위에 있으나 진실로 그 덕이 없으면 감히 예와 악을 만들지 못하며, 비록 그 덕이 있으나 진실로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또한 감히 예와 악을 만들지 못하느니라.

雖有其位나 苟無其德이면 不敢作禮樂焉이니라 雖有其德이나 苟無其位면 亦不敢作禮樂焉이니라

수유기위나 구무기덕이면 불감작례락언이니라 수유기덕이나 구무기위면 역불감작례락언이니라     


【28-05】 108/130 공자가 주나라를 따르는 이유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나라의 예를 말할 수 있으나 기(杞) 나라는 예를 고증하기에는 부족하다. 내가 은나라 예는 배웠으니 송나라에 예가 남아 있을 뿐이다. 내가 주나라의 예를 배웠으니 오늘날 이것을 쓰고 있으니,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子曰 吾說夏禮나 杞不足徵也요 吾學殷禮하니 有宋이存焉이어니와 吾學周禮호니 今用之라 吾從周호리라 

자왈 오설하례나 기불족징야요 오학은례하니 유송이존언이어니와 오학주례호니 금용지라 오종주호리라     


【해설】

 주나라는 기원전 1046년에서 기원전 256년까지 790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기원전 1046년~ 기원전 771년까지 수도를 지금의 시안인 호경에 두었다. 기원전 771년~기원전 256년까지 수도를 낙양으로 옮겨 동주라고 한다. 동주시대는 771년~ 403년 춘추시대, 기원전 403년~221년까지 전국시대였다. 

 주나라 무왕은 도읍 부근을 왕이 직접 통치하고 나머지 영토를 친족과 공신에게 나누어 주어 통치하게 하는 봉건제를 시행하였다. 주의 봉건제는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운영한 종법적 봉건제였다. 주나라 무왕은 자신을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천자라 부르고, 백성을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덕치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의 천명사상과 덕치주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주나라는 덕치를 기반으로 정치 체계, 가정 및 종법 질서를 확립하여 중국 고대 국가의 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예악(禮樂)을 덕치와 예치를 중시하는 전동을 갖게 되었다. 『주례』는 주(周) 왕실의 관직 제도와 전국 시대(戰國時代) 각 국의 제도를 기록한 책으로, 후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직 제도의 기준이 되었다. 『주역』은 하늘과 땅 음양의 변화와 자연의 순환과 섭리, 생명작용을 설명한 책으로 자연과 삶의 변화, 소통과 희망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주나라는 예악과 정치체제, 문화 등이 정비된 고대국가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주나라를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여겼고 주나라의 문물을 바탕으로 새롭게 국가질서를 정비하려고 했다. 공자는 하나라의 예는 고증할 수 없고, 은나라는 보존되어 있지만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판단하여 주나라의 예를 따른다고 했다. 공자는 주나라의 예를 정비한 주공을 좋아했고 꿈에서 주공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주공은 주례를 만들어서 주나라의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 예는 직분에 맞는 바른 도리인 정명(正名)을 구체화한 것이다.  공자는 주례에 따라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고 태평성대를 꿈꾸었다. 그 당시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백성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라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민생을 살는데 주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공자의 이러한 인식은 자본주의 중심사회에서 사회복지 사회로 나아가려 할 때, 사회의 제도와 규칙을 새롭게 마련해야 한다는 인식과 유사하다. 개인의 자유와 시장경제 질서를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보완하여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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