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하랑 May 28. 2022

길을 건너도 좋습니다

시작은 늘 새롭지

탄 탄 대 로 !



"저, 그만두려고요."


오랫동안 준비한 이직이 결실을 맺었다. 


처우 협의와 입사 날짜까지 확정 짓고 팀장에게 퇴직 의사를 밝혔다. 팀장은 일견 쉽게 수긍하는 듯 보였다.

그는 경력직으로써 이 회사에서 살아남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얘기를 하다 결국 그의 직장 생활과 이직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너무 말을 많이 해서인지 나중엔 막말을 하기도 했다. 그의 입에서는 '배신'이라든지 '부적응' 같은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새로운 곳에 가면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하며, "결혼이 목표라는 건 아니지만..."을 덧붙였다.


팀장으로부터 얘기를 전해 들은 상무는 바로 나를 불러 차를 한 잔 내어줬다. 그 역시 쿨하게 보내주겠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곧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이 회사가 얼마나 좋은 회사인지, 특히 여사원들에겐 더할 나위 없다는 것을 어필했다. 그로써는 이런 좋은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내가 이해가 되지 않을 거다. 너 따위가 뭐라고, 전에도 제대로 못 해서 이직한 거 아니니, 네가 잘했으면 승진에 대한 고민 따윈 할 필요가 없는 거지, 등의 뜻으로 이해한 내가 자격지심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이 회사보다 못한 곳으로 이직을 한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곤, 앞으로 겪게 될 힘든 미래를 예견하기도 했다. 작은 회사는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체계와 오너의 황제 경영 때문에 견디기 힘들 텐데, 혹시라도 대기업이라면 어마어마한 업무량 때문에 사람답지 못하게 생활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어딜 가나 힘들긴 마찬가지이며, 모든 것은 내 마음먹기에 달렸기에 이곳에서 조금 더 열정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고 했다. 결국 그와의 티타임은 '애사심'에 대한 한바탕 연설로 마무리되었고, 지금까지의 얘기는 나에 대한 애정과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들과 면담을 하는 내내 난 컨닝이라도 한 학생처럼 교무실에 앉아 혼나는 기분이었다. 그건 면담이라고 이름 붙이면 안 되는 일방적인 훈계였으며, 그 시간 덕분에 퇴사에 대한 의지는 다이아몬드만큼 단단해졌다.


나 역시 그들의 말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 밖에선 보이지 않는 단점들이 안으로 들어가면 수도 없이 보일 것이고, 불합리한 일들은 여전히 일어날 것이다. 다시 적응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는 이곳에 계속 있을 때보다 클 가능성이 높다. 그런 것들을 모른 체하고, 다 잘 될 것이라는 낙관만을 가지고 결정한 일이 아니다. 각오한 것이다. 결심한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더 변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 것이다.


청신호라고 생각하는 내 결정을 그들은 적신호라고 말한다. 건너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어이 난 길을 건널 생각이다. 지금 건너지 않으면 신호는 언제 다시 켜질지 모른다. 길을 건너고 나서 적신호가 들어온다면 또 청신호를 기다리면 될 일이다.


다시 한번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안녕히 계세요, 저는 여기서 건너가야 해요."

작가의 이전글 럭키한 무명 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