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싸우고 싶습니다
손톱을 깎다 거스러미를 발견하곤 습관적으로 잡아 뜯는다. 곧바로 빨간 피가 배어 나온다. 손톱깎이로 그 부분만 잘라내면 될 것을, 자르지 못하고 질질 끈 대가다.
거스러미만이 아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늘 이런 식이다. 화가 났든 서운한 일이 있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감정의 모서리를 잡고 내내 그 속으로 스스로를 말아 넣는다. 기어코 감정이 찢어져 터지면 조용히 그와 선을 긋는다. 상대방은 그 영문을 모르고, 난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렇게 한 번의 다툼이나 갈등도 없이 멀어진 사람들은 분풀이라도 하듯 돌아가며 꿈에 나타난다. 꿈에서 깨면 자연스레 후회의 시간이 찾아오고, 후회의 내용도 반복된다. ‘내가 더 참을 걸’ 아니면 ‘솔직하게 내 마음을 말할 걸’.
상상도 자주 한다. 그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빠르고 사나운 말투로, 논리와 사실로 무장해 쏘아붙이고 상대방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상상.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난 싸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K와도 그렇게 멀어졌다. ‘네가 갑자기 약속을 바꾼 것이 서운해, 그런 일을 문자로 통보한 것이 화가 나.’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저 먼저 연락하지 않고, 약속을 잡지 않고, 그동안 쌓아왔던 섭섭한 일들을 복기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난 20년 지기 친구를 조용히 잃었다.
연애를 할 때도 비슷했다. 문제없다고 생각했을 관계에서 갑자기 이별을 통보받은 상대방은 처음엔 어이없어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분노했다. 그들의 기억 속에 난 ‘정말 이상한 여자’로 남아있지 않을까.
드라마에서처럼 소리 지르며 싸우고 속을 전부 내보이고, 한바탕 운 다음 끌어안고, 다시 손을 잡고 함께 길을 걸어가는 일 같은 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화주의자라거나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라서가 아니다. 나는 싸우는 것이 두렵다. 그 상황만 떠올려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숨이 가빠온다. 상대와 싸우고 멀어지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싸우는 상황 그 자체를 견딜 수 없다. 지나치게 상대방을 배려하고 그의 기분을 맞춰 주려는 성격 탓에 누군가 화내는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다.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주눅 들 내 모습이 그려져 애초에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으려 한다. 싸우기보다 차라리 헤어지는 편을 택하는 것이, 낮은 자존감 때문인지 스스로를 과보호하려는 것인지 둘 다인지 잘 모르겠다.
에리히 프롬은 갈등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갈등은 감탄의 원천이며, 자신의 힘과 흔히 ‘성격’이라 부르는 것을 키우는 원천이다. 갈등을 피하면 인간은 마찰 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된다. 어떤 격정이든 금방 가라앉고 모든 욕망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감정이 얕아지는 기계다’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중에서」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라면 싸우지 않는 난 기계인 걸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앎’을 애써 회피하는 난 어떤 욕망을 꿈꾸는 걸까.
[이 글은 2W 매거진 26호 '나의 싸움 일지'에 수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