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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란 Jul 31. 2021

싸락눈 공주

눈의 여왕 -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땅속 깊은 곳에 사는 악마가 흑요석이라는 검은 돌에 비틀어진 마음을 섞어 거울을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따스한 것도 추악하고 흉측하게 보이는 거울이었습니다. 신과 천사들을 골탕 먹이고 싶었던 악마는 거울을 들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하늘 높은 곳에서 내리쬐는 강한 햇빛에 그만 거울을 떨어트리고 말았습니다. 거울은 산산조각이 나 사람들의 눈과 마음속에 박혔습니다. 거울 조각이 박힌 사람들은 차갑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눈의 공주가 처음으로 싸락눈을 만들었습니다. 공주의 작고 하얀 손끝에서 찬바람이 일더니 가루처럼 하얀 싸락눈이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습니다. 눈꽃 정원에서 놀던 공주는 눈의 여왕을 찾아 얼음 성으로 달려갔습니다. 눈의 여왕은 오늘도 악마의 거울 조각이 박힌 인간을 가둔 방에서 무언가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이 방에 있는 동안에는 절대 방해하면 안 돼.”

 어릴 때부터 공주가 눈의 여왕에게 귀가 아프게 들은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특별한 일이 일어난 날이라 가만히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공주가 인간을 가둔 방의 문을 열었습니다.

 “엄마, 아니, 여왕님! 내가 드디어 눈을 만들었어요!”

 “안돼! 어서 나가!”

 눈의 여왕이 공주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인간의 가슴에서 날카로운 거울 조각이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놀란 공주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순간 거울 조각이 부르르 흔들렸습니다. 눈의 여왕이 거울 조각과 공주를 번갈아 보았습니다. 여왕이 달려와 공주의 앞을 막아섰습니다. 거울 조각이 순식간에 날아와 여왕의 가슴에 박혔다가 한순간 사라졌습니다.

 거울 조각이 사라지자 여왕의 몸을 감싸던 환한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습니다. 은빛으로 빛나던 머리카락은 윤기를 잃고 흰머리가 되었습니다. 얼굴에는 자글자글 주름이 생겼습니다. 여왕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눈의 공주, 난 곧 재가 되어 사라질 거야. 너와 함께할 시간이 많이 남은 줄 알았는데……. 이제 네가 눈의 여왕이 되어야 한단다. 눈의 여왕이 되면 함박눈을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러려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영원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왕의 몸이 회색빛 재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습니다.

 “아냐, 아냐, 아냐!”

 놀란 공주가 머리를 마구 흔들었습니다. 눈의 여왕이 사라지는 모습을 본 공주가 그 자리에 폭 쓰러졌습니다.


 쓰러졌던 싸락눈 공주가 며칠 만에 정신을 차렸을 때, 공주의 머릿속에는 눈의 여왕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공주의 마음이 기억을 지워버린 것입니다. 공주의 머릿속엔 단지 ‘영원한’이라는 글자만 새겨졌습니다. 엄마와의 따듯한 추억이 사라진 공주는 마음도 점점 차가워졌습니다. 겨울이 되면 뭉쳐지지 않는 싸락눈을 뿌리며 추운 겨울을 더 춥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런 소망도,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싸락눈만 내리는 하늘을 보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싸락눈 공주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의 공주는 싸락눈 공주로 불렸습니다.    


 공주도 어느새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저절로 만들어질 거라 생각한 함박눈은 어쩐 일인지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공주는 온전한 ‘눈의 여왕’이 되는 비밀을 풀기 위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기웃거렸습니다. 싸락눈 공주가 들여다본 창문에는 하얀 성에가 꽃처럼 피었습니다.


 핀란드의 어느 작은 도시를 돌아볼 때였습니다. 도시를 가로지르며 맑은 강이 흐르고 하늘에는 무지갯빛 오로라가 얇은 커튼처럼 일렁이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작은 오두막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공주가 창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댔습니다. 오두막 안에는 할머니와 오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창문에 생긴 성에를 보며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얘들아, 왜 계속 싸락눈만 내리는지 아니? 싸락눈 공주가 눈의 여왕이 되는 비밀을 풀지 못해서란다. 그래서 온전한 ‘눈의 여왕’이 되지 못하는 거야. 창문에 저렇게 얼음꽃이 피는 건 공주가 집안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지.”

 누나 게르다와 남동생 카이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을 빛내며 할머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싸락눈 공주는 바보예요. 전 태어나서부터 줄곧 싸락눈만 보고 자랐다고요. 이렇게 오랫동안 수수께끼를 못 푸는 걸 보니 바보가 틀림없어요.”

 카이가 입을 삐죽거렸습니다. 카이는 원래 상냥하고 착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눈에 뭔가 들어간 것 같다며 아파한 후로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자기 생각만 했습니다. 공주의 눈에 카이의 가슴에서 빛나는 악마의 거울 조각이 보였습니다. 웬일인지 공주의 가슴이 저릿했습니다. 그때 카이도 창문에 비친 싸락눈 공주를 보았습니다. 눈부시게 하얗고 반짝이는 아름다운 공주였지만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놀란 카이가 누나를 부르자 공주는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다음 해 겨울, 카이가 꽁꽁 언 강에서 썰매를 타고 있을 때였습니다. 싸락눈 공주가 하얀 썰매에 카이의 썰매를 묶었습니다. 갑자기 썰매가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카이가 내려 달라고 소리쳤지만, 싸락눈 공주는 못 들은 척 자신의 성으로 데려갔습니다. 카이가 도와주면 눈의 여왕이 되는 비밀을 풀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차가운 얼음 성에 도착한 카이가 추위에 덜덜 떨었습니다. 싸락눈 공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카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습니다. 공주가 입을 맞추자 카이는 춥지도, 무섭지도 않았습니다.

 “카이, 온전한 ‘눈의 여왕’이 되는 비밀을 풀 수 있도록 도와줄래? 도와주면 너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할게.”

 카이가 넋이 빠져나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공주는 카이에게 ‘영원’이라는 얼음 퍼즐을 주었습니다. 공주의 가슴에 새겨진 ‘영원’이라는 글자에 비밀의 해답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편, 게르다와 할머니는 슬픔에 빠져 눈물로 겨울을 보냈습니다. 카이가 썰매를 타다 얼음이 녹아 강물에 빠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덧 다시 봄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카이가 사라진 슬픔에 몸이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게르다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카이가 그리웠습니다.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카이의 소식을 알고 싶었습니다. 게르다가 얼음이 녹은 강으로 달려갔습니다. 강가에는 하얀 꽃잎의 숲바람꽃이 융단처럼 깔려있었습니다. 숲바람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게르다에게 귓속말을 했습니다.

 ‘카이는 죽지 않았어. 카이는 죽지 않았어.’

 게르다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강물아, 카이를 데려갔니? 내가 가장 아끼는 걸 줄게. 나를 카이에게 데려다줘.”

 게르다는 할머니가 떠준 빨간 조끼를 벗어 강물에 던졌습니다. 강물이 알았다는 듯 출렁거렸습니다. 마침 강가에는 조그만 배 한 척이 묶여 있었습니다. 게르다가 배에 올라타자 배가 저절로 스르륵 움직였습니다. 배가 강물 한가운데로 가자 강에 짙은 안개가 끼었습니다. 게르다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배는 뿌연 안개 속을 천천히 흘러갔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누군가 배를 끌어당겼습니다. 깜박 잠이 들었던 게르다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얼굴이 동그랗고 키가 작달막한 할머니가 긴 지팡이의 꼬부라진 손잡이를 뱃머리에 걸어 배를 끌어당겼습니다. 지치고 무서웠던 게르다는 다정한 얼굴의 할머니를 보자 안심이 되었습니다.

 “인간 여자아이가 어떻게 마법의 강을 건너왔니? 우선 우리집에 가서 좀 쉬었다 가거라.”

 할머니는 온갖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숲속의 통나무집으로 게르다를 데리고 갔습니다. 사실 할머니는 마법사였습니다. 게르다가 카이 이야기를 했지만 혼자 지내는 것이 외로웠던 할머니는 귀여운 게르다와 영원히 함께 살고 싶었습니다. 할머니가 고소한 아몬드 쿠키와 달콤하고 따끈한 차를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과거를 잊게 하는 마법의 빗으로 게르다의 머리를 빗겨주었습니다. 게르다는 마법사 할머니와 지내는 것이 행복했지만,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게르다는 할머니가 부엌의 선반 위에 있는 작은 단지에서 무언가 몰래 꺼내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궁금해진 게르다는 할머니가 잠깐 숲으로 열매를 따러 간 틈에 작은 단지를 내렸습니다. 예쁜 장미꽃이 그려진 하얀 단지에는 달콤한 냄새가 나는 갈색의 쿠키가 들어 있었습니다. 게르다가 쿠키 한 개를 꺼내 먹었습니다.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모조리 생각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기억하지 못했던 엄마의 뱃속에 있던 기억까지 났습니다. 엄마의 뱃속은 참 따듯했습니다. 엄마는 가장 좋은 것을 게르다에게 주고 더러운 찌꺼기를 가져갔습니다. 카이를 처음 만났던 날도 떠올랐습니다.

 “엄마, 이거 인형이야?”

 어린 게르다가 눈을 꼭 감고 있는 갓난아기의 작은 발을 만지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눈도 못 뜬 아기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게르다는 가족들과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기억이 떠오른 게르다는 마법의 쿠키를 몇 개 싸서 카이를 찾으러 길을 나섰습니다.


 게르다는 만나는 모든 것에게 카이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게르다의 이야기를 듣고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깍깍거리며 말했습니다.

 “싸락눈 공주가 어떤 남자아이를 데려가는 걸 봤어.”

 게르다는 카이가 사라지기 1년 전 겨울, 싸락눈 공주를 보았다고 흥분해서 말하던 카이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싸락눈 공주가 카이를 데려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어느 날 얼음 성으로 카이의 누나가 찾아왔습니다. 눈보라 속을 뚫고 오느라 신발이 벗겨졌는지 빨갛게 언 맨발에 피가 흐르고 온몸은 눈투성이였습니다. 얼음 성은 인간의 힘으로는 오기 힘든 곳입니다. 바들바들 떨고 있었지만, 게르다의 몸에서는 따스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얼음성의 가장 큰 방에서 카이를 발견한 게르다가 달려가 카이를 끌어안았습니다.

 “카이, 진짜 살아있었구나! 내 동생이 살아있었어.”

 게르다가 카이의 꽁꽁 언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내가 왔어, 카이! 게르다 누나야. 알아보겠니?”

 하지만 카이는 잠시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다시 퍼즐을 맞추는 것에만 열중했습니다. 게르다가 주머니를 뒤적거렸습니다.

 “마법의 쿠키야, 카이. 조금이라도 먹어봐.”

 게르다가 쿠키를 조금 잘라 카이의 입에 넣어 주었습니다. 쿠키를 우물우물 씹던 카이의 눈빛에 점점 생기가 돌았습니다. 게르다가 카이의 손을 잡고 할머니가 불러 주던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족과 행복했던 기억이 떠올라 게르다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고였던 눈물이 ‘툭’하고 카이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눈물이 카이의 손에 닿자 카이의 꽁꽁 얼었던 몸에 온기가 돌았습니다. 게르다가 카이의 손을 꼭 잡고 일어섰습니다. 둘을 지켜보던 싸락눈 공주가 앞을 막아섰습니다. 그리고 서늘한 눈빛으로 둘을 노려보았습니다.

 “그 아이를 놔둬. 그 아이는 내가 온전한 ‘눈의 여왕’이 되도록 돕기로 했어. 난 ‘영원’한 것을 찾아야 한단 말이야.”

 싸락눈 공주의 말에 게르다가 옛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할머니는 싸락눈 공주가 눈의 여왕이 되려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영원한 가치를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게르다가 공주의 앞으로 한 발짝 나섰습니다.

 “싸락눈 공주님, 제가 공주님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곳에 오는 길에 마법사 할머니에게서 구한 거예요. 우선 이 쿠키를 먹어 보세요.”

 게르다가 쿠키를 꺼내 두 손으로 공주에게 내밀었습니다. 게르다의 당당하고 맑은 눈빛을 본 공주가 쿠키를 받아들었습니다. 공주는 사람들의 말에서 진실과 거짓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쿠키를 조금 떼어 입에 넣었습니다. 달콤하고 고소한 쿠키가 입에서 사르르 녹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어릴 때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공주가 눈을 스르륵 감았습니다.    

  

 눈의 여왕이 공주를 품에 안고 얼굴을 비볐습니다. 자장가를 불러 주고 까꿍 놀이를 해 주었습니다. 첫걸음마를 떼는 공주를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스러운 눈으로 공주를 한없이 바라봤습니다. 눈의 여왕이 공주의 귀에 속삭였습니다.

 “아가, 엄마는 네가 있어 너무 행복하단다. 너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해.”

 기억을 떠올린 공주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또 다른 기억도 생각났습니다. 인간을 가둔 방에서 나오는 지친 엄마에게 공주가 물었습니다.

 “엄마, 엄마는 맨날 거기 들어가서 뭐 하는 거야? 나 심심하단 말이야.”

 “우리 공주가 엄마를 잘 기다려줘서 엄마가 사람들을 치료해 줄 수 있는 거야. 엄마가 데려온 사람들의 가슴에는 악마의 거울 조각이 박혀 있어. 저 사람들을 그냥 두면 세상은 점점 어둡고 삭막해져서 엄마도 함박눈을 만들 수 없단다.”

 눈의 여왕이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왜 함박눈을 못 만들어?”

 “공주도 함박눈으로 눈사람 만들어 봤지? 함박눈은 다른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온기로 만들어진단다. 그래서 포근하게 내리고, 잘 뭉쳐지는 거야. 우리도 함박눈처럼 뭉쳐볼까?”

 눈의 여왕이 공주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옛 기억이 떠오를수록 싸락눈 공주의 마음에 사랑이 넘쳐흘렀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순간도 생각났지만, 엄마와 함께했던 행복한 기억으로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순간순간의 행복한 추억이 살아가는 힘을 주었습니다. 싸락눈 공주가 살며시 눈을 떴습니다. 공주가 게르다를 지그시 쳐다봤습니다. 놀랍게도 공주의 눈에 게르다의 과거가 보였습니다. 마법의 쿠키는 인간에게는 자신의 기억만 떠오르게 하지만 싸락눈 공주에게는 다른 사람의 과거도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게르다가 마법사 할머니를 만나 마법의 쿠키를 구해 나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뭇가지에 뿔이 걸려 죽을 뻔한 순록을 구해주고 순록을 타고 이곳까지 오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온갖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동생을 찾겠다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마법보다 강한 힘이 있었습니다. 게르다의 몸에서 흐르던 따스한 기운이 공주에게도 느껴졌습니다. 싸락눈 공주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게르다, 카이를 잠깐 나에게 맡겨 보겠니? 카이의 가슴에 박힌 악마의 거울 조각을 빼줄게.”

 공주의 미소를 본 게르다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공주가 카이를 작은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공주가 눈을 감고 기억 속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마음을 모아 카이의 가슴에 오른쪽 손바닥을 갖다 댔습니다. 공주의 손끝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일었습니다. 카이의 가슴에서 천천히 거울 조각이 빠져나왔습니다. 빠져나온 거울 조각을 공주가 단단한 얼음 속에 가둬버렸습니다.


 “누나, 게르다 누나!”

 카이가 게르다에게 달려갔습니다. 예전처럼 다정한 눈빛으로 게르다를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켜보는 싸락눈 공주의 마음에 작은 감동이 일었습니다. 잠깐 살다 사라지는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한 인간의 마음에는 마법보다 큰 힘이 있었습니다. 공주는 처음으로 자신이 한 일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공주의 눈빛이 희망으로 반짝거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공주의 손끝에서 탐스러운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싸락눈 공주가 엄마를 닮은 미소를 지으며 포근한 함박눈을 내렸습니다.

 카이가 맞추던 ‘영원’이라는 글자는 산산이 부서졌다가 ‘순간’이라는 글자로 바뀌었습니다. 공주의 머리 위로 환한 빛이 쏟아지며 에메랄드빛 왕관이 내려왔습니다. 왕관을 쓴 싸락눈 공주는 누가 봐도 온전한 눈의 여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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