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단편 동화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느 겨울, 양평의 어린이 공원묘지에 작은 꽃밭이 생겼어요. 차가운 땅속에 잠들어 있는 아기에게 미안해하는 마음과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담긴 꽃다발이 모인 꽃밭이에요. 매서운 바람이 한번 지나갈 때마다 꽃들이 오들오들 떨었어요. 흰 국화와 붉은 장미, 노란 해바라기가 금방이라도 꽁꽁 얼어버릴 것 같아요. 낮에 잠깐 비추던 여린 햇살은 이른 저녁 집으로 돌아갔어요. 어둠이 꽃들의 고운 색까지 야금야금 먹어 치웠어요. 내일 아침이 오기 전 꽃들은 모두 얼고 시들어 버릴 거예요.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하나, 둘 떠올랐어요. 순간 하얗게 질려 있던 국화가 흰빛을 내며 밝게 빛나기 시작했어요. 볼이 빨갛게 언 장미는 붉은 연기를 내뿜었죠. 얼굴이 누렇게 떠 있던 해바라기는 노랗고 따스한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어요. 흰빛과 붉은 연기와 아지랑이에서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어른들 잘못이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앞으로 다시는 아프지 마.’
하얀빛과 붉은 연기와 노란 아지랑이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한군데로 모여들었어요. 모두 섞여 한 덩어리가 되더니 회오리바람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어요. 회오리는 서서히 위로 올라가며 돌다가 커다랗고 파란 솜사탕처럼 변했어요. 파란 솜사탕이 몽실몽실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솜사탕 안에서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한 날개가 언뜻 보였어요.
지호는 매일 밤 피노키오 동화책을 꼭 안고 파란 요정에게 소원을 빌었어요. 피노키오를 사람으로 만들어준 파란 요정이라면 지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어젯밤에도 소원을 빌다 잠이 들었어요.
학교에 갈 시간이 다 되어 엄마가 지호를 흔들어 깨웠어요. 지호는 아침도 못 먹고 학교로 향했어요. 지호가 교실에 들어섰어요.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에 받을 선물 이야기를 하며 정신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지요. 방학식 날이라 모두 들떠 있었어요. 딱 한 사람, 지호만 빼고요. 제멋대로 자란 머리카락이 눈을 가린 데다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어서 혼자만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았지요. 얇은 바람막이 점퍼 위로는 때 낀 목이 드러났어요. 담임 선생님이 교탁 앞으로 지호를 불렀어요.
“지호야, 어디 아팠어?”
지호가 말없이 고개만 가로저었어요.
“체험학습 신청서도 안 내고, 어머니도 전화를 안 받으셔서 무단결석으로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집에 무슨 일 있었니?”
담임 선생님이 이것저것 물었지만, 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다른 사람에게 집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면 안 된다고 했거든요. 엄마와 영영 헤어져 못 만나게 된다고요. 엄마와 단둘이 사는 지호는 그 말이 제일 무서웠어요. 지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어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선생님이 혀를 쯧쯧 찼어요. 방학식이 끝나고 지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교문 밖으로 나왔어요.
“얘, 꼬마야-.”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어요. 지호가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지요. 교문 밖 앙상한 가로수 아래에 파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지호를 보며 손짓을 했어요.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등에는 얇고 투명한 날개까지 달려 있었지요. 지호의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어요. 내일이 크리스마스라 이벤트 같은 걸 하는 걸까요?
“저요?”
지호가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어요. 하지만 목소리는 개미 소리만큼 작았지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환하게 웃는 여자의 눈이 별처럼 빛났어요. 얼굴은 눈처럼 하얀데다 입술은 벚꽃 잎처럼 분홍빛으로 반짝거렸지요. 진짜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 같았어요.
“소원 한 가지만 말해보렴. 크리스마스 선물이란다.”
처음이었어요. 지호는 크리스마스에 한 번도 선물을 받은 적이 없었거든요. 파란 요정이 지호의 기도를 들었나 봐요. 지호가 발끝을 들고 파란 요정의 귀에 속삭였어요. 지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어요.
“우리 엄마가 매일 기분 좋게 해주세요.”
지호와 눈을 마주친 파란 요정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면 오늘 받은 선물은 엄마한테 드리렴.”
파란 요정이 포근한 미소를 지었어요. 지호도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었지요.
지호가 살그머니 현관문을 열었어요. 엄마는 현관 옆 컴퓨터 방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어요. 지호가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말을 걸었어요. 하지만 목소리는 개미 소리만큼 작았답니다.
“엄마, 오늘 교문 앞에 파란 요정이 와서 엄마 선물 줬어.”
엄마는 지호를 힐끗 쳐다보더니 대꾸도 하지 않았어요. 지호가 입을 꾹 다물었어요. 더 이상 엄마를 귀찮게 하면 화를 낼지도 모르거든요. 거실에는 여기저기 과자 봉지가 널려있고 싱크대에는 음식 찌꺼기가 묻은 그릇이 산처럼 쌓여있었어요. 지호가 가방에서 파란 요정이 준 선물을 꺼냈어요. 무지갯빛 포장지 속에는 주스처럼 짜 먹는 곤약젤리가 하나 들어있었지요. 지호가 침을 꿀꺽 삼켰어요. 엄마는 기분이 좋을 때만 밥을 주기 때문에 지호는 늘 배가 고팠거든요. 하지만 파란 요정이 엄마에게 주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지호가 컴퓨터 방으로 들어가 곤약젤리 주스를 책상 위에 살며시 올려두었어요. 엄마가 빽 소리를 질렀어요.
“방해하지 말고 빨리 나가!”
게임이 잘 안 되나 봐요. 지호가 화들짝 놀라 방을 나왔어요. 엄마가 욕을 하며 게임을 하다 화가 안 풀리는지 키보드를 부서질 듯 두드렸어요. 신경질적으로 컴퓨터를 끈 엄마가 목을 뒤로 젖히며 식식거렸어요. 그때 곤약젤리가 엄마의 눈에 들어왔어요. 사과와 청포도 그림이 그려져 있는 곤약젤리가 마치 엄마를 유혹하는 것 같았지요. 엄마의 눈이 번들거렸어요. 그리고는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곤약젤리를 움켜쥐었어요. 뒷면에 무언가 쓰여 있었지만, 엄마는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할 것처럼 뚜껑을 열고 허겁지겁 쭉 짜서 먹었어요. 엄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곤약젤리가 나무에서 방금 따서 먹는 과일처럼 상큼하고 달콤했거든요. 게다가 시원하면서 몰캉몰캉한 식감까지 더해져 기분이 저절로 좋아졌어요. 곤약젤리를 다 먹은 엄마가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어요.
거실로 나온 엄마가 널려있는 쓰레기를 치우고 밀린 설거지를 했어요. 지호를 쳐다보며 빙긋 웃어주기까지 했답니다. 지호가 멍하니 엄마를 쳐다봤어요. 무표정하던 지호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었어요. 파란 요정이 정말 소원을 들어준 것 같아요. 지호는 너무 행복해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죠.
엄마가 밥을 차려 주었어요. 따끈한 밥에 계란말이와 김뿐이었지만 지호는 엄마가 차려 주는 밥이 제일 맛있었어요. 지호가 손으로 계란말이를 집었어요. 마음이 급했거든요. 엄마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지호의 손을 찰싹 때렸어요. 지호가 계란말이를 떨어트렸어요.
“하여튼 못살아, 내가! 젓가락으로 안 먹으면 앞으로 밥 안 줄지 알아!”
지호는 젓가락질이 서툴렀어요. 지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어요. 파란 요정의 마법이 금방 사라진 것 같아 더 속상했지요. 그런데 엄마는 우는 걸 제일 싫어했어요. 엄마가 훌쩍거리는 지호의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어요.
쿨렁-
두 눈을 꼭 감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지호가 살며시 눈을 떴어요. 분명히 엄마가 지호를 때렸는데 등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요. 마치 말랑말랑한 물풍선에 맞은 것 같았지요. 엄마도 깜짝 놀라 자기 손을 바라봤어요.
“끼아악! 내 손이 어떻게 된 거야?”
엄마 손이 푸르스름하고 반투명한 젤리로 변해 있었어요. 지호의 입이 떡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어요. 엄마가 벌떡 일어나 거실 벽에 붙어있는 거울 앞으로 달려갔어요. 심호흡을 하고 거울에 손을 비춰 보았지요. 거울에 비친 엄마 손은 예전 그대로였어요. 눈을 비비고 엄마가 다시 손을 쳐다봤어요. 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돌아와 있었어요. 지호도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엄마 손을 쳐다봤어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엄마 손이 다시 예전처럼 돌아와 있었어요. 엄마가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하아- 요즘 내가 많이 피곤했나? 헛게 다 보이네.”
엄마가 이마를 짚으며 침대에 누웠어요. 엄마가 들어가고 지호 혼자 밥을 먹었어요. 젓가락을 쥐고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잘되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손으로 반찬을 집어 먹고는 옷에다 쓱 문질러 닦았어요.
엄마의 침대 밑에 지호의 이불이 깔려 있어요. 지호는 씻지도 않고 그대로 이불로 들어갔어요. 엄마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또 게임을 하고 있었지요. 지호는 엄마가 밤새 게임을 하다가 내일 온종일 잘까 봐 걱정스러웠어요.
지호의 걱정대로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어요. 혼자 일어나 TV를 보던 지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어요. 식탁 위에는 어제저녁 먹은 밥그릇이 그대로 있었어요. 점심때가 다되어 지호가 조심스럽게 엄마를 깨웠어요.
“엄마, 배고파.”
엄마가 들은 체도 안 하고 계속 잠만 잤어요. 지호가 다시 한번 엄마를 깨웠어요.
“엄마, 나 배고파.”
“아유, 지겨워. 넌 엄마가 밥으로 보이지?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한지 알아?”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호를 쏘아보았어요. 지호가 움찔 놀라 뒤로 한걸음 물러났어요. 어제저녁 계란말이를 케첩에 찍어 먹고 옷에 문질러 닦아서 지호 옷이 엉망이었어요. 엄마가 눈을 치켜떴어요.
“너, 누가 음식 먹고 옷에 닦으래. 어? 네가 그러니까 엄마가 밥을 안 주지!”
엄마가 지호의 윗도리를 신경질적으로 벗겼어요.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몸이 씻지 않아 꼬질꼬질했어요. 엄마의 눈에서 이글이글 불꽃이 타올랐어요.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손을 번쩍 들었어요. 엄마의 손과 발이 사정없이 지호의 여린 몸을 때렸어요.
텅, 텅, 통, 통-
그런데 어제처럼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요. 엄마가 또 소리를 질렀어요.
“꺄악! 이게 뭐야. 나 왜 이래? 내 손, 내 발 왜 이래?”
엄마의 손과 발이 어제처럼 반투명한 젤리로 변해 있었어요. 아니, 푸르스름한 색은 조금 더 진해져 있었지요. 어제는 지호도 엄마도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자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어제보다 조금 더 오랫동안 젤리로 변해 있었어요. 엄마가 손과 발을 미친 듯이 흔들었어요. 몇 초 후 다시 예전의 손과 발로 돌아왔어요. 엄마가 입술을 깨물며 방안을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컴퓨터 방으로 달려갔어요. 책상 위에 어제 먹고 버린 곤약젤리 주스의 포장지가 그대로 있었지요. 엄마가 포장지를 유심히 살폈어요. 뒷면에 주의사항이 쓰여 있었어요.
- 경고 : 이 주스를 마신 후 아이를 때리면 젤리로 변함.
엄마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어요. 어제 지호가 가지고 온 주스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 같아 지호가 꼴도 보기 싫었어요. 엄마가 지호의 바지를 벗겨 버렸어요. 그리고는 거칠게 지호의 팔을 잡고 현관으로 끌고 갔어요.
“엄마,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
지호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엄마 손에 끌려갔어요. 무얼 잘못한 지도 모른 채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어요. 엄마가 현관문을 열려고 문손잡이를 잡았어요. 하지만 어느새 또 손이 젤리로 변해 있었어요. 손끝에서부터 조금씩 젤리로 변하더니 팔, 어깨, 가슴. 발끝에서 종아리, 허벅지 엉덩이까지 차츰차츰 젤리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모두 젤리로 변하고 얼굴만 남았어요. 엄마가 소리를 질렀어요.
“아악! 내가 잘못했어요. 나 좀 살려주세요.”
엄마가 계속 소리를 질렀지만 목과 턱, 입까지 젤리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머지않아 모두 젤리로 변할 것 같아요. 엄마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어요. 결국, 온몸이 젤리로 변해버렸지요. 놀라서 얼음처럼 굳어있던 지호가 젤리로 변한 엄마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어요. 아무리 엄마가 무서워도 지호에게는 엄마밖에 없었어요. 이제 혼자라고 생각하니 엄마에게 맞을 때보다 더 무서웠어요.
그때 거실 쪽에서 바람이 불더니 파란 요정이 나타났어요.
“지호야, 엄마는 벌을 받는 거야.”
파란 요정의 모습이 보이는지 젤리로 변한 엄마의 눈동자가 조금 움직였어요. 지호가 파란 요정에게 매달렸어요.
“요정님, 우리 엄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내가 말 잘 들으면 엄마도 앞으로 그러지 않을 거예요. 우리 엄마 없으면 안 돼요. 흐흐흑-.”
파란 요정이 무릎을 꿇고 앉아 지호의 눈물을 닦아 주었어요. 괜찮다는 듯 등도 쓸어주었죠. 파란 요정의 품에 안긴 지호가 울음을 그치자 요정이 젤리로 변한 엄마의 가슴에 마법의 지팡이를 갖다 댔어요. 그러자 지팡이 끝에서 별처럼 빛이 났어요. 파란 요정은 엄마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어요. 엄마의 가슴 속 깊은 곳에는 회색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어요. 심장이 구름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요. 파란 요정이 지팡이를 살짝 흔들었어요. 순간 심장을 둘러쌌던 회색 구름이 한겹 한겹 벗겨졌어요. 구름이 흩어지며 엄마의 슬픈 기억이 홀로그램처럼 하나씩 떠올랐어요.
젊은 모습의 할머니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10살 무렵의 엄마를 빗자루로 때렸어요.
“내가 너 때문에 못산다, 못살아! 너만 아니면 벌써 팔자를 고쳐도 열 번은 고쳤을 텐데……. 이 웬수야,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날아오는 빗자루를 손으로 막으며 10살의 엄마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어요.
“누가 낳아 달랬어? 왜 엄마 마음대로 낳아놓고 나한테 화풀이야, 왜, 왜?”
옛 기억을 보는 엄마의 눈에 원망의 눈빛이 떠올랐어요.
잠시 후 다른 기억이 떠올랐어요. 식식거리며 주먹을 꼭 쥐고 있는 10살의 엄마 앞에 코피가 흐르는 동네 남자아이가 서 있었어요. 남자아이 옆에는 아이의 엄마인 듯한 사람도 서 있었어요. 아이의 엄마가 10살의 엄마를 손으로 밀치며 나무랐어요.
“너 깡패야? 어디서 감히 내 아들한테 주먹질이야, 어? 아유, 속상해! 수찬이, 너! 앞으로 저런 아비 없는 자식하고는 어울리지도 말아, 알았어?”
10살 엄마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어요. 10살 엄마는 돌아서 가는 남자아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확 잡아당겼어요. 남자아이의 비명에 아이의 엄마가 눈에 불을 뿜으며 10살 엄마의 뺨을 후려쳤어요. 10살 엄마는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아줌마는 계속 뺨을 후려쳤어요. 엄마가 아줌마의 손을 뿌리치고 산으로 도망쳤어요. 도망치는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어요. 엄마의 눈에서 빛이 서서히 사라졌어요.
엄마의 옛 기억을 지켜보던 지호가 괴로운 듯 소리쳤어요.
“우리 엄마한테 그러지 마. 그러지 말라고!”
젤리로 변한 엄마의 몸이 부르르 떨렸어요.
“당신도 많이 힘들었군요. 지금 지호도 당신 때문에 많이 힘들어요.”
엄마의 기억을 지켜보던 파란 요정이 측은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봤어요.
10살 엄마의 모습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지호와 엄마의 모습이 보였어요. 엄마는 게임을 하고 있었어요. 엄마 옆에서 서성이던 지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엄마, 배고파.”
엄마가 지호를 노려봤어요. 신경질적으로 일어난 엄마가 부엌으로 가더니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식탁 위에 던져 주었어요. 엄마를 졸졸 쫓아온 지호를 확 밀치고는 다시 게임을 하러 가버렸지요. 엄마가 지호를 때리고 욕을 하는 모습도 보였어요. 지호의 눈에서도 빛이 사라졌어요. 10살 엄마의 눈빛을 닮아 갔어요.
엄마와 자기 모습을 본 지호의 얼굴이 점점 무표정하게 굳어 갔어요. 엄마의 얼굴은 비참하게 일그러졌고요. 뚫어질 듯 지켜보던 지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어요.
“엄마는 나쁜 엄마야! 외할머니랑 똑같아!”
지호가 젤리로 변한 엄마에게 주먹을 마구 휘둘렀어요. 이번에는 지호의 주먹이 젤리에 튕겨 나갔어요. 주먹을 휘두르는 지호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어요. 그런 지호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어요. 파란 요정이 흥분한 지호를 꼭 끌어안았어요. 지호의 울음이 천천히 잦아들었어요.
파란 요정이 엄마 가슴에 대고 다시 지팡이를 흔들었어요. 그러자 엄마의 가슴 깊은 곳에서 유리구슬처럼 작아진 심장이 떠올랐어요. 분홍빛이지만 힘겹게 팔딱이고 있었어요. 흩어졌던 회색 구름은 물방울로 변해 위로 올라갔어요. 잠시 후 메마른 엄마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어요.
“슬픔이 너무 커서 당신의 사랑을 가두어 버렸네요. 하지만 당신은 할 수 있어요. 과거의 슬픔을 걷어내세요. 그럼 진짜 엄마가 될 거예요. 그래야 당신도, 아이도 행복해질 수 있답니다.”
파란 요정이 젤리로 변한 엄마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말했어요. 엄마가 흘린 눈물 때문에 젤 리가 뭉글뭉글 녹아내리기 시작했어요. 얼음이 녹듯 조금씩 녹아내렸지요. 젤리가 녹은 부위는 엄마의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엄마가 지호를 끌어안으려고 팔을 뻗었어요.
“지호야,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지호가 흠칫 놀라며 엄마의 손길을 피했어요.
“지호가 다시 당신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엄마니까 해내야 해요.”
파란 요정이 이번엔 지호의 가슴을 향해 지팡이를 흔들었어요. 그러자 지호의 가슴 속에서 작은 씨앗이 싹을 틔웠어요. ‘용기’라는 새싹이었지요. 지호는 앞으로 절대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거예요. 아프다고 말하고, 힘들다고 소리칠 거예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거예요. 파란 요정이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어요. 파란 요정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연기가 되어 베란다 창문으로 빠져나갔어요.
“당신은 진짜 엄마가 될 수 있어요.”
파란 요정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엄마의 가슴에 울려 퍼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