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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만식 Jul 15. 2023

송암 선생과 배롱나무

   고향 친구들과 가끔 서울 근교에 있는 산이나 북한강  강변길을 따라 트레킹 한다. 친구들은 직장에서 대부분 은퇴하였으며 전직은 기업체 임직원, 교사, 공무원 등으로 지금은 쥐미활동이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인생 2막을 보내고 .

  요즘 모임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주로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깔깔거리고 웃는다. 때로는 사회적 이슈를 진지하게 토론하고 이견이 생기면 격론도 벌이지만 뒤끝은 없다. 시 친구는 오랜 친구가 좋다.


   지난 12월 초, 청평에서 북한강 강변길을 따라 트레킹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숲을 걸으며 초겨울 정취에 흠뻑 빠져드는데, 신문기자였 박사가 배롱나무 이야기를 슬며시 꺼냈다. 모교의 교정에는 한 그루 배롱나무가 기품 있게  있었다. 


   1970년대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박사 고향집은 학교에서 20여 리 떨어진 농촌 마을에 있기에, 중학교 시절부터 시내에서 누나들과 자취다.

   어느 날, 친구 부친 송암 선생은 집 정원에 있는 배롱나무를 학교에 기증하고 싶다는 뜻을 담임 선생님께 전해, 생님은 이를 교무회의  안건으로 상정했다. 교장 선생님은 학부형의 순수한 요청을 감안하여 기념식수를 허락하셨다, 대신 학교 행정의 공정성과 공평성 등을 고려하여 외부에는 일절 알리지 않는다는 조건부 허락이었다.


   배롱나무는 꽃이 오랫동안 피어 백일홍 나무라고도 한다. 옛적 유학자들이 이 나무를 좋아하였고, 지금도 고택이나 절에 가면 배롱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꽃말은 부귀 또는 헤어진 벗을 그리함이다.

모교의 베롱나무

   송암 선생은 1917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학을 배우고, 평생 농사를 지으며 글을 읽으신 선비였다. 39세에 아들을 낳고 대를 이을 자식이라 생각하여 지극 정성으로 키웠다.

   홍 박사의 고향마을은 600여 년을 조상 대대로 살아온 홍 씨 집성촌으로 많은 선비가 살았다. 마을 동쪽에는 시원한 동해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고 뒤로는 멀리 태백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옆에는 솔숲이 우거지고 육백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마읍천이 유유히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해당화 향기도 그윽한 농촌 마을이다.


   송암 선생은 집 마당에 있는 여러 배롱나무 중에 자태가 뛰어난 한 그루를 고른 후, 이식 준비를 마쳤다. 그 이튿날, 동녘이 밝아오자 배롱나무를 지게에 지고 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학교까지 약 4시간을 걸어야 하는데, 게다가 높고 험한 한재(지역의 고개이름)를 넘어야만 한다.

   아마도 고갯마루에서 파도가 넘실대는 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땀을 식히고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셨을 자그마한 체구의 송암 선생을 상상해 본다. 그때 아버님연세55세라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적삼은 땀으로 흠뻑 젖었을 것이다. 

   송암 선생은 학교에 도착하여, 자식과 같은 심정으로 배롱나무를 교정에 정성껏 심으셨다. 그는 배롱나무가 아들과 함께 꿋꿋이 잘 자라기를 바라 또한 자식을 바르게 키워주는 선생님에게 배롱나무로 보답하고 싶었던 것이다.


   홍 박사의 말을 듣고 있던 친구들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우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무거운 배롱나무를 어깨에 지고 왜 4시간이나 걸어 학교에 오셨는지 ᆢ 아버지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기 때문이다. 

   "지난 오십 년 동안 아무에게도 이 말을 할 수가 없었네!"라고 말하는 홍 박사는 솟구치는 감정을 억지로 자제하여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배롱나무를 심으신 송암 선생의 혜안과 선비 가풍에서 흘러나오는 의연함에 감동했다.

역사적으로 어머니의 자식사랑 이야기는 끝도 없다지만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생활  중 아들에게 전답을 물려줄 수 없는 처지를 대신하여 '근(勤)'과 '검(儉)'이라는 글을 하피첩에 써서 두 아들 학유와 학연에게 보냈다. 즉, 물질보다 고귀한 아버지의 사랑을 자식에게 전한 것이다.

   친구는 학교에 가면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고,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지만 곁에서 격려와 용기를 주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을 잡고 열심히 공부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성적이 월등하여 교육감 표창장을 받아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렸다.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동아일보사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그리고 책임자 시절에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맹자에 관한 논문으로 공연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대학교 특임교수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정년퇴직을 한 직후 당시 의대생이었던 아들과 함께 아프리카에 의료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또한 코이카(KOICA) 국제봉사 단원으로 스리랑카에서 2년간 봉사활동을 하였다. 다시 남미 볼리비아로 봉사활동을 가기 위해 영월있는 코이카 연수원에서 힘든 교육을 마쳤지만, 코로나19발생했다. 그래서 출국하지 못하고 국내에서 인터넷 강의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박사는 두 아들을 두었다. 첫째는 자원봉사활동으로 잘 알려진 홍성휘 의사고 둘째는 벤처회사의 책임자로 근무한다. 온 가족이 봉사활동을 생활화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특히, 교사 자격이 있는 친구 부인은 종합병원이 운영하는 병원학교에서 어린이 환자를 무료로 가르치는 등 사회봉사 경력이 무려 20년이 다.


   송암 선생은 82세의 일기로 1998년, 유명을 달리하여, 친구동해 바다가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아버님의 유택을 마련하였다. 

   우리는 올여름, 송암 선생의 산소에 성묘하여 감사함을 전하고, 모교에도 들러서 송암 선생의 사랑이 숨 쉬고 있을 배롱나무를 찾아보기로 약속했다..

맹방해수욕장
창작수필  등단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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