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일규 Oct 19. 2023

'측량할 수 없는 인간의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

우리가 비로소 삶을 긍정할 때까지. 최은영, 『밝은 밤』

 문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단편 소설에 익숙해지면서 언젠가부터 장편 소설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장편 소설은 방대한 서사를 가지고 있어 작품을 읽는 데 시간을 많이 들뿐더러, 취향에 맞지 않으면 끝까지 읽기 어렵다. 또한 단편집은 몇 편만 읽어도 그 작가의 작품을 ‘읽음’의 상태가 되지만, 장편은 그 이상의 분량을 읽고도 중간에 이탈하면 ‘읽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장편을 고를 때 나의 감정과 시간을 투자할 만한 작품을 고르기 위해 나름 신중해진다.


 하지만 그런 나도 몇몇의 작가 앞에서는 고민 없이 장편 소설을 고른다. 개중에 오늘은 최은영 작가의 첫 장편 소설 『밝은 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나는 한국 문학을 처음 접하는 친구들에게 최은영 작가의 책을 가장 먼저 추천할 정도로 그녀의 작품을 좋아한다. 끊이지 않는 폭력과 차별의 역사 속에서 아픔을 감내하고 살아낸 인물들이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복원하며, 회복해내는 과정은 늘 저릿한 위로를 건넸으니까. 그녀의 소설 앞에 서면 신중함을 넘어선 확신의 마음으로 작품을 만나게 된다.




 『밝은 밤』은 증조모, 할머니, 어머니, 주인공 지연까지 4대에 걸친 거대한 서사를 다루는 작품이다. 남편의 바람으로 이혼한 지연은 살던 곳에서 떠나고자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희령의 연구소에 취직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우연히 어머니와의 불화로 오랜 시간 연락이 닿지 않던 외할머니를 만나게 되고, 할머니에게 그녀의 어머니인 증조모 삼천과 증조모의 친구 새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복원된다.


 일제강점기 백정의 딸로 태어나 차별과 핍박 속에 살았던 증조모, 중혼을 겪으며 남편에게 버림받으면서도 아버지에게 폭언을 들었던 할머니,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엄마, 남편의 바람으로 이혼했음에도 가족들에게조차 손가락질 받으며 떳떳하게 살지 못해 고통받는 지연. 100년에 가까운 역사 같은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녀들은 무언가 비슷한 삶의 형태와 아픔을 가지고 있다.

 오래전의 이야기가 유독 생생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녀들이 겪어온 폭력이 너무나 익숙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교적 가족 윤리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성과 약자에게 가해졌던 폭력들은 방식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이 시대에 존재한다는 것을 지연의 삶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상처뿐인 것 같은 소설 중후반부에 들어서 지연의 상처는 조금씩 회복 궤도에 오른다. 할머니를 만나기 전 지연은 증조모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 대한 깊은 유대를 갖게 된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이유로 지연과 증조모는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지만, 증조모는 지연의 상처 곁으로 다가왔다. 지연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할머니와 엄마의 슬픔을 알게 됐고, 자신의 상처를 마주 보게 된다. 나와 닮은 사람들이 시대의 아픔과 폭력 속에서 연대하며 살아내는 과정을 보고, 또 울음을 삼켰던 엄마의 삶을 돌아보며 지연 또한 회복의 과정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우울한 감정들이 슬픈 마음을 돕는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슬픈 마음은 내가 살아가는 한 나의 마음에서 이유 없이, 그리고 끝없이 발생하는 것이며, 우울한 감정들은 우울한 작품들에서 오는 마음과 그것 자체이다. 그렇게 슬픈 마음이 우울한 작품들로 둘러 싸일 때, 작품 속 인물과 '함께 슬픔'을 느끼는 것만으로 위로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우리와 함께 슬픈 인물은, 그리고 그렇게 끝나는 소설들은 독자를 위로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슬픔의 단계에서 끝이 나는 억지스럽지 않은 소설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슬픔으로 귀결되는 소설들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인물의 상처가 서사 속에서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자연스레 회복되길 바랐다.


 최은영 소설의 진수는 그녀의 작품엔 성장, 회복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물의 상처가 복원 궤도에 오르는 과정과 회복의 절차가 매우 설득력 있다.

『밝은 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인물들의 관계와 상처가 회복되는 과정을 담으면서도 마무리가 전혀 억지스럽거나 신파적이지 않다.


 지연은 천문대 연구원으로 우주와 별에 빗댄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소설 속에는 인간의 외로움도, 혐오스러움도, 슬픔도 우주에 빗대어 표현된다. 그런 문장 중 가장 좋았던 문장은 인간의 삶을 비가시권의 우주로 비유한 문장이다.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나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지연은 비로소 인간의 삶을 긍정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 무해할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