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김정선 지음
언제나처럼 당신은 쓰고 나는 읽습니다.
교정·교열을 하기 위한 필수 책이라기보다는 퇴고하는 과정에서 참고할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다. 저자는 기계식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기에 문장력보다는 문법을 잘한다(그런데 ‘동사의 맛’은 문장력도 좋다......).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맞춤법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것보다는 이곳저곳의 깊기도 하고 얕기도 한 어질러진 무형을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다. 그래도 맞춤법이 글을 읽는 것을 방해하는 정도까지는 가고 싶지 않다. 그런 정도에서 한 번 쭉 읽어보고 새겨두면 좋을 것이 몇몇 있다. 그중 하나가 ‘적의의 것들’이다.
[적의의 것들]만 생각해도 우리가 쓴 글이 새롭게 탄생한다. 전공을 살려서 오랜 시간 생활해 온 나는 ‘적’을 특히 많이 사용한다. 온갖 것에 적을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보고서가 된다. 그렇게 배웠고, 의심 없이 써왔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동안의 보고서를 모두 부정받는 것이므로 오늘도 나는 ‘적’과 ‘보여진다’를 무수히 사용한다.
[제대로 했다 해도 수정한 흔적이 별로 없으면 대가를 받기가 미안해지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그래서 저자는 글을 너무 잘 써서 수정할 부분이 별로 없는 글이 부담스럽다고 한다. 내가 업으로 삼고 있는 분야에서는 학부 혹은 석사를 졸업하고 지정된 기관에서 수련을 받는 제도가 있다. 수련을 받는 이는 수련생이고, 수련을 감독하는 자는 수련 감독자라고 부른다. 이때, 수련생은 자신이 검사한 환자에 대한 보고서를 수련 감독자에게 슈퍼비전을 받아야 한다. 슈퍼비전을 하는 정도는 정해져 있지 않아서, 수련 감독자에 따라 슈퍼비전의 방향이 천차만별이다.
1. 뭐라도 수정해야 슈퍼비전을 했다고 생각하는 수련 감독자는 빨간 줄을 긋고 무엇이든 수정해 오라고 한다. 그리고는 슈퍼비전을 성실하게 했다고 어필한다.
2. 아무리 슈퍼바이저라도 검사를 한 사람은 수련생이기에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하고, 크게 엇나가는 정도가 아니면 수정을 하지 않는다. 대신 다음에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길 권하고, 이에 관련된 과제를 낸다.
나는 후자다. 그런데 후자는 밟히기 일쑤다. 심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하는 것인가 보다. [‘알고 모르고’를 확신할 수 없다면 안다고 말할 수 없을 텐데] 요즘은 아주 조금 아는 것에 대해서도 넘치게 아는 것처럼 내세우는 이들이 우위에 선다. 나의 겸손은 무식함이 되고 나약함이 되어 옥죄는 사슬로 돌아온다. 결국 [나 자신이 문젯거리였다]
힘든 시간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삶의 두께였다] 그래서 크고 두려운 날들은 이제 나도 손절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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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의 맛
교정의 숙수가 알뜰살뜰 다쳐낸 우리말 움직씨 밥상
김정선 지음
자신이 업으로 삼고 있는 것을 중심으로 써나가는 글은 자연스럽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니 맛깔나게 쓰기 위해 의도적으로 애쓰지 않아도 된다. 좋은 가르침이다. 무수히 많은 직업의 세계가 주는 봄바람이 콧속으로 훅 끼쳐 들어온다.
글을 쓰는 이 와중에도 헷갈리는 것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얻을 수는 없다. 그리고 아하 하며 깨달아 이 책을 표본 삼아 가지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저 재미 삼아 읽고, 교정, 교열은 전문가에게 맡겨야겠구나 생각하면 된다. 나의 상태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자유롭게 타닥타닥 글을 쓰면 된다.
동사의 맛은 사전적 예시가 아닌, 감성을 건드리는 문장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묘미가 있는 책이지요.
내 마음을 덮으려 했던 글들을 모아봤어요.
[하물며 사람이 지난 자리야. 시친 듯 지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친 듯 지난 사람도 있고, 공그른 듯 지나는가 하면 기운 듯 지나기도 하며, 때로는 온통 누비고 다니는 사람도 있으리라.
때로는 마음의 근육이나 관절도 접질리고 겹질려 옴짝달싹 못하게 될 때도 있다. 우울감이 심해지면 남자는 몇 날 며칠을 새벽녘까지 잠들지 못하고 힘들어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천장이 마치 활짝 갠 하늘처럼 새파랗게 보이더라고. 이미 병원 치료까지 받아 본 지인은 그럴 때가 더 무서운 거라고 잔뜩 겁을 주었지만, 어쨌든 남자에게 그날은 우울감으로 늘 우중충하던 궂은 날들 속에서 반짝하고 ‘활짝 갠 어느 날’이었다.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아직 거꾸러진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그때가 되면 이 지질한 삶도 그만 걷어치울 수 있겠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철역으로 내려가는데 반대편에서 지인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려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거슬러 올랐다. 몇 걸음 오르고 나서 내가 바보짓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몸을 돌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간 다음 반대편으로 옮겨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 지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괜스레 내 마음이 다 오그라든다.
오목한 곳엔 물이든 흙이든 괴기 마련이다. 사람의 마음 또한 그렇게 오목해질 때가 있는 모양이다. 마음속에 무언가 괴어 흘러 넘 칠 것만 같을 때가 있으니까. 남자가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마침내 흘러넘치는 것을 막을 수 없어서.
엉엉 꺼이꺼이 울었다. 덕분에 한 가지 배운 건 있어요. 그렇게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진다는 말. 믿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마치 신물까지 다 게워냈을 때처럼 몸의 기운은 물론 마음의 기운까지 다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느낌이더라고요.
봄날 아침에 눈떠서 물 한 모금 마시고 밖으로 나가면 앞집 감나무와 대추나무에 어느새 연둣빛 새순이 눈튼 게 보인다. 세상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모습들도 많고 내가 미처 눈뜨지 못해 알지 못하는 것들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봄날에 눈트는 새싹을 볼 수 있다면 눈 뜨고 보지 못할 것들을 봐야 하는 괴로움도, 세상일에 눈뜨지 못하고 미련스럽게 구는 나 스스로도 얼마든지 참아 줄 수 있다. 새싹이 눈틀 때 나 또한 눈뜨면 그만이니까.
삶에 주어진 시간은 함부로 당길 수도 늦출 수도 없죠. 몸으로 좁히지 못하는 거리를 마음으로만 다그며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는 시간.
자꾸 뒤처지다 보면 자신이 뒤쳐져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물건처럼 여겨지기도 하겠다. 어느새 쉰을 코앞에 둔 나이가 되었다. 딱히 이뤄 놓은 것도 없이 사십 대를 지나게 생겼다. 먹고살다 보니 그리되었다. 말해놓고 보니 이런 말을 앞으로 얼마나 더 하게 될까 싶어 민망해진다. 먹고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핑계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그럴듯한 핑계 아닌가. 먹고살다 보니, 또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다 보니 먹고사는 일이 무슨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느껴진다. 가장 기본적인 일인데 가장 높이 들린 귀한 목적처럼 여겨진다고나 할까. 참담한 일이다. 혹여 그것이 신성불가침이 아니라 치외법권 지역 같은 곳은 아니었을까. 도망가 숨기 딱 좋은 곳.
바람이 부는 순간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라지만, 가슴속에 부는 바람은 여전히 무수한 가지들처럼 몸부림치고 있다. 뿌리를 뽑아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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