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전혀 예체능을 하는 사람이 없는데, 다 커서 30대에 발레를 취미로 하는 줄 알았더니만, 대회까지 나간다는 나름 어메이징 한 소식에 엄마와 동생이 궁금해서 콩쿠르 당일날 구경하러 왔다. 일일 매니저 해주는 남자친구 덕에 편하게 콩쿠르 장소에 도착한 나는 엄마와 동생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는 바로 헤어졌다. 나를 보러 와 준 셋. 나의 최선을 다해 안무를 하는 모습을 봐주러 멀리서 달려와준 것 만해도 너무 감사하기도 하고, 한껏 상기된 마음으로 발레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발레 콩쿠르 첫 무대 구경
오직 무대에만 강렬한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음악에 맞춰 아름답게 움직이는 발레리나들. 역시 중고등학생들이 어릴 때부터 해온 실력이라 그런지 동작 하나하나 가벼우면서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직 차례가 오지 않아 바로바로 진행되는 고등부 순서를 5분 정도 구경하는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이 순간들을 꼭 기억하고 적어두고 싶었다. 그날 내 눈에 담긴 모든 것. 그날 무대현장의 습도, 온도, 분위기들을 글 속에 담아두고 싶어서 계속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저기가 내가 설 무대라니...'
어제 눈을 감으면서 이미지트레이닝으로 움직였던 상상의 공간과 사뭇 비슷해, 낯설게 느껴지니 않았다. 주변은 어두컴컴하지만, 춤추는 나만 반짝거리는 분위기. 너무나도 비슷해서 기분이 좋았다.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자신감이 생겼다. 이미지트레이닝 한 느낌도 비슷했고, 무대를 즐기러 온 것이라는 마음 가짐을 새벽부터 가슴에 품고 와서 그런 것일까.
무대에서 관중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히려 더 활짝.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강렬하게 무대 쪽으로 비친 조명. 숨죽이며 바라보는 심사위원들과 바라보는 몇몇의 관중들. 고요하고도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공기의 분위기가 무거우면서도 신선함이 느껴졌다. 나는 구경하는 사람으로 온 것이 아닌데, 너무나도 모든 것이 신기하고 즐겁게 느껴졌다. 눈가는 내려가고, 입가에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예상보다 많이 텅텅 비어있는 관중석들이 눈에 띄었다. 자녀들이 나오는 차례쯤에 살짝 들어와서 구경을 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국발레대회이기도 하고, 심사에 방해되지 않기 위해서 최소한의 사람만 들어오도록 통제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밖에서 계속 연습하다가 무대로 바로 서는 경우가 많았기에, 안에 긴장감보다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연습하는 사람들한테서 느껴지는 급박함과 긴장감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콩쿠르 뒷무대는 신기하고도 긴장감이 넘쳤다.
무대 뒤. 긴장감과 두근거림이 한가득 공존해 있는 공간이었다.
스텝진의 안내에 따라 다음 순서차례의 무리들과 함께 무대 뒷현장. 앞 순서가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 나가서 춤을 출 수 있도록 대기하는 공간이었다. 무대의 뒷공간은너무나도 좁고, 뭔가 막혀있는 곳. 앞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고, 답답한 공간이라는 막연한 상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널찍하게 떨어진 큰 커튼. 눈부시게 환한 공간. 앞에 앉아있는 관중들에게 들릴 수도 있으니 조용해야 할 것 같은 공간이 의외로 작은 소음이 허용되는 공간이었다. 커튼 옆에서 각자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자신 콩쿠르 음악이 시작되면, 커튼 사이에서 나와 바로 열심히 준비한 안무들을 멋지게 뽐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심장은 침착하면서도 가슴은 부풀었다. 가슴속에 몽글몽글하면서도 간질간질한 느낌이 일었다. 입꼬리는 신나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내가 서있는 공간의 주변에 같이 대기하고 있는 멋진 어린 친구들을 구경하는 것도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또한 50대 아저씨도 안무 옆에서 연습하고 있는 모습을 보곤 너무 인상 깊었다. 주위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구경하고는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래 나도 무대순서 안 까먹게 연습해야지.'
부끄러워서 쭈뼛쭈뼛 서있기보다는 나도 그들처럼 연습에 매진했다. 내 차례가 3번째가 되었다. 무대 뒤에서 사진을 열심히 남겨주신 발레선생님께서는 최선을 다하고 오라고, 실수해도 미소는 항상 유지하고 있어라는 조언을 계속해서 해주셨다.
그렇게 한 달 이상 연습한 결실을 여기서 맺게 되다니.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무대 앞까지 오다니.
알 수 없는 신기한 감정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162번 변지혜. 에스메랄다.
콩쿠르 첫 무대.
나의 차례가 불려졌다.
그래. 지금이야. 가자!
자신감 가득 담은 곧은 가슴, 길어 보이면서도 부드러운 마무리의 손끝, 발끝. 빳빳하게 든 고개.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장착할 미소를 가지고는 무대 가운데로 성큼성큼 발끝을 세우며 걸어갔다.
내 앞에 보이는 시야는 너무나도 눈부셨다. 너무나도 강렬한 조명 덕분에, 관중들과 심사위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대 공간에 나 혼자 서있는 느낌이었다.
'아니? 이 느낌은 내가 계속해서 눈을 감고 이미지트레이닝 할 때, 느껴졌던 느낌과 비슷하잖아?'
오히려 이미지 트레이닝 할 때의 느낌과 비슷했고, 무대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따뜻하고도 눈부신 조명 아래에 신나게 음악에 맞춰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머릿속은 긴장상태이면서도 멍한 상태였다. 몸이 기억하는 대로 저절로 조종되어 움직이는 기분. 나만의 음악적 해석 넣어 자신감 있게 한껏 움직여댔다. 유튜브영상에 에스메랄다 콩쿠르 안무들을 찾아보면, 한쪽 다리를 위로 일자로 발차기를 하며 탬버린을 치고, 2번 3번 계속 돌며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뽐내는 안무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발레 비전공자이고, 초보에 맞게 나의 안무는 발레의 동작 기본에 의한, 기본을 위한 동작들을 뽐내었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정확하게 동작들을 보여주고 자신감 있게 움직이는 것이 나의 콘셉트이었기에. 내가 준비한 것들을 당당하게 뽐내는데 집중했다.
연습할 때도 약간 고민되었던, 막혔던 순서들을 무사히 해내고, 당당히 끝냈다.
마지막 포즈를 자신감 있게 해내고는 바로 무대 뒤로 퇴장.
'후아. 끝났다.'
무대 반대편에서 기다리던 발레 선생님께서 너무나도 잘했다고 칭찬샤워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촉촉하게 젖을 듯이 마구마구 부어주셨다. 콩쿠르 끝나고도 입꼬리가 내려오질 않았다. 아침 독서할 때 생각했던, 나에게 주는 상을 받은기분이었다. 너무나도 후련하고, 뿌듯한 느낌. 힘들었던 준비과정이 싹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끝나자마자 건물 밖으로 나왔다.
여름이 곧 올 것 같은 눈부신 햇살이 포근했다. 약간 부는 바람도 기분 좋게 만드는 기분. 눈을 감으며 만족스러움과 기쁨을 한가득 안았다.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남자친구와 가족들이 보인다. 그들에게 함박웃음 지으며 달려갔다.
"우리 딸 잘하네~"
엄마의 칭찬이 나를 더욱 웃음 짓게 만들었다. 최선을 다한 순간을 모두 다 숨죽여 지켜봐 주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 순간에 대해서 격려해 주는 상황들이 자존감이라는 나의 작은 새싹에 영양제를 한가득 부어준 느낌이었다.
이 날은 우울증을 극복한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내가 해낼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재능이라는 것이 있을까 고민하던 날들이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나의 존재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혼재된 우울함을 발레콩쿠르 무대에서 춤으로 승화시킨 느낌이다. 이제 매일 밤 지하세계에 머물러있던 자존감과 부정적인 감정들을 가득 담은 마스크팩을 벗어버리고, 지상으로 나와 긍정적이고도 자신감 넘치는 웃는 마스크팩을 붙이고 기분 좋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최선을 다 퍼붓는 느낌. 이 느낌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도전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드디어 빨간 벽 동화에서 나온 빨간 벽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섰다. 아름답고 멋진 세계. 더욱더 즐겁게 즐기면서 80세까지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