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이맘때가 되면 옛 고향집의 세밑 추억이 그립다. 십 대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재너머 고향집의 풍경이 떠오른다. 설날이 다가오면서 조금씩 분주해졌다. 설날 한 주전쯤 되면 흰 가래떡 준비를 위해 떡방앗간에 가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또한 그곳에 가시는 어머님을 졸졸 따라가 좀 더 먼저 가래떡을 먹어보는 것이 설레는 설 명절의 시작이었다.
물에 불려 건져둔 새하얀 멥쌀 한두 말을 머리 위에 이셨다. 한 오리쯤 되는 팔부능선 민둥산 비탈길 여러 개를 넘다 보면 떡방앗간의 두 박자 기계소리가 자연스레 목적지를 알려주었다.
설날이 되기 달포 전부터는 동네형들 누나들과 뒷동산에 올라 솔방울을 모아 떡방앗간에 연료로 팔기도 했다. 그렇게 용돈을 버는 것도 하나의 세밑 전 행사였다. 이렇게 그 시절 고향의 세밑풍경은 분주하고 활기 있고 정감 있었다.
설날 하루 이틀 전 객지 나갔던 가족들이 선물을 한가득 사들고 돌아왔다. 집안에서는 설 차례 음식준비에 바빴고 그러한 모습들이 어린 시절에는 무척이나 신나고 설레는 일들이었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대개 농한기의 여유로운 시기였다. 청년들과 동네어른 그리고 부녀들까지도 함께 모여 전통놀이를 즐기는 등 분주했고 또한 다가올 농사철을 대비하는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시절 동네마다 많았던 형 누나들, 선남선녀들이 도회지로 모두 떠나버렸다. 그 후 수십 년이 지나버린 고향땅의 느낌은 사뭇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 지 오래다. 따라서 한 세대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실감케 만든다.
또한 부모님마저 이 세상에 없는 고향을 생각할 때는 순간 먹먹함에 이르기까지 한다. 이제는 어쩌다가 고향이 그리울 때면 추억 속의 고향과 그때의 명절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물론 이것이 인생의 자연스러운 순리임을 받아들인다. 한편으론 시간의 무한한 연속선상에서 나 자신의 현재를 직시하는 것이며 헛된 무상의 감상에 빠지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고향길에서 만난 아이에게 대뜸 너는 누구냐를 묻기 전에 너의 아버지가 누구냐를 묻게 될 때 혼자서 웃음 짓게 된다. 어릴 적 나 자신이 이웃마을 어른들한테서 들었던 그 질문을 입장이 바뀌어 내가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인생 백세시대라 한다. 따라서 얼마 안 있으면 너의 조부가 또는 증조부가 누구냐 하고 고향아이에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옛 고사에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라고 한 그 이야기 속 산골 처사가 떠오른다. 그가 동굴에서 나와 제 옛집을 찾아가니 자신의 손자 증손자의 가정이었다고 하였지만 현세에서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간다면 겪어야 될 일 같다.
이렇게 인간수명의 연장은 상상 속의 수직적 관계를 현실화하고 우리에게 더 넓은 시간여행을 허용하게 해 줄 것이다. 즉 105세 노인이라면 약 5세 때 기억을 바로 어제일 같이 떠올리며 백 년 시간의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오늘 같은 세밑에 옛 추억을 생각할 때 있음 직한 시간여행이 그럴 게다.
어릴 적 그 시절 같은 명절 세밑이 그립다.
이맘때면 빠져드는 어쩔 수 없는 감상에 젔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