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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 굴뚝이야기

장항재련소 굴뚝

지난 주말 장항에 다녀왔다.

올해 본가의 가족모임 장소였기 때문이다.

고향과 지척인 데도 이렇게 머무른 적은 처음이었다.

장항의 옛 지명을 딴 상호의 횟집에 앉아서 바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곳이 삼국통일 때 나당군사의 최후결전이 벌어졌던 기벌포란다. 사실상 이쯤의 물은 바닷물인지 강물인지 불분명한 곳이다.

금강하구의 기수지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해의 큰 조수차로 강하구가 나팔상이 되어 바다 느낌이 강한 곳이다.


상가 이층에 위치한 횟집은 확 트인 전망이 좋았다.

저편 군산쪽이 의외로 가까워 손에 닿을 듯 지척이다. 신설 아치형 군장대교가 시원스레 걸려있다. 물가의 뜬다리 저반시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또한 교과서에 나오던 유서 깊은 시설, 뜬다리 부두란다.


눈길을 장항 쪽으로 돌리니 높직한 굴뚝이 보였다. 커다란 바위산 위에 견고하게 자리하여 예사롭지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장항재련소 굴뚝이던가.

장항은 재련소 굴뚝으로 유명하다. 그 유명세는 아마도 그간의 최고, 최대의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오랜 기간 그런 자리를 차지해 왔고 아직도 그 존재감은 여전하다.


그런 이유로 이제는 문화유산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 같다. 이것 외에도 군장지역은 일제 때 유산들이 많이 남아있는 장소다. 불편한 진실이라도 아무튼 우리 땅의 유산이니 적절한 검증 후 보존이 기대된다.


장항재련소 굴뚝은 일제강점기 자원수탈의 일환으로 세워졌다. 강 건너 군산항이 쌀수탈의 현장이었다면 이곳 장항은 비철금속등 자원을 재련해 수탈해 가는 장소였다.

장항선 철길의 종점인 이곳 재련소는 자연스레 채굴자원의 집산지가 되었다.


일제 때 만들어진 철길들은 대부분 곡물과 자원을 수탈하여 일본에 보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특히 동남아등에 부설된 좁은 폭의 협궤열차가 그러했다. 이 땅에도 지금은 사라진 수인선과 수려선, 꼬마열차 노선이 있었다. 그 흔적을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여주 이천 쪽을 가다 보면 방치된 옛 철교교각이 긴 세월의 검은 때를 머금은 채로 간간이 눈에 띈다.


장항재련소 굴뚝은 한동안 이 나라 산업화의 상징물이었다. 후진국 시절, 취업난이 심각할 때 이곳은 명실상부한 최고의 직장이었단다.

하지만 우리의 산업화 후 공해의 상징인 굴뚝산업으로 전락했다.


그 굴뚝에서 내뿜던 공해물질이 인근농지와 주민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 같다.

날씨변동 때 그 매연과 낙진이 떨어지는 날이면 농사는 물론이고 주민들의 건강까지 위협했기 때문이다.


공해의 피해지역은 방대하였다. 어느 해던가 우리 고향 부여에까지 미친 적이 있었다. 여름에 남서풍이 강할 때면 수십 킬로를 날아갈 수도 있었다..

나의 초등시절, 어느 날 동네어른들의 수군거림을 들었다. 장항재련소 굴뚝의 연기가 여기 벼농사에 피해를 줬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십리밖 우리고향 까지도 재련소 굴뚝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증거다.


또한 그 굴뚝이 얼마나 유명세가 있었던지 중학시절 도덕샘의 우스겠소리가 생각난다. 수업중 코를 끊임없이 후비던 친구에게 장항재련소 굴뚝소제를 그만 멈추라던 호통소리다. 이렇게 그 굴뚝은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그후 결국 재련소는 70년대 말 폐쇄되고 다른 제조업체가 들어섰다.

하지만 굴뚝만은 여전히 남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건재하여 장항의 상징물 역할을 하게 됐다.


고향에서 멀지 않은 장항인데도 이렇게 굴뚝아래에 서보긴 처음이다. 예전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우리 고향과는 생활권 자체가 달랐다.

이제는 터널과 고속도로 등이 놓여 이웃동네 같은 느낌이다.

격세지감이 따로없다.


장항해변의 생태공원길을 걸었다.

높직이 설치된 스카이워크와 장항의 랜드마크 재련소 굴뚝이 한눈에 들어왔다.

색다른 이곳만의 조망거리가 분명했다.


지방자치에서도 이들을 연계한 볼거리 창출을 계획 중이란다.

어쨌든 장항 굴뚝과 지역 유산들을 아우르는 독특한 테마명소가 조성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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