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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그리고 흑산도 홍어장수

오키나와 가족여행

오키나와의 태양 빛이 강렬하다. 검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기체가 선회를 한다. 잠시 후 180석의 중소형 국적기가 나하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열도의 작은 섬에 아열대의 태양빛이 내리꽂는다. 도심의 가로수들은 남국의 초록을 맘껏 뿜어내고 있다.


가족여행으로 이웃나라의 휴양지를 찾다 보니 이곳에 오게 됐다. 도심의 북적거림도 적고 남국의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한 휴양지다. 열도의 하와이란 말이 어울리게 쭉 뻗은 야자수길이 이국적이다. 도심의 거리가 한눈에 말끔해 보인다.

아기자기한 숍들이 많아 우리네 분위기와도 흡사하다.

저 멀리 정박된 초대형 크르주선의 하얀 외벽이 아열대의 태양아래 눈부시다.


랜트카를 인수받고 나하시내 외곽길로 나섰다. 좌측통행 운전방식이 처음이라 무척 낯설다. 점점 운행이 익숙해지니 주변경관이 눈에 들어온다. 곡선형 북서해안길이 아름답다.

오랜 선진국의 혜택인양 역시 해변경관이 잘 정비돼 있다.

수십 년 전까지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이곳이다. 따라서 밀리터리 시설들이 자주 눈에 띄고 아메리칸 빌리지도 있다.


바다 쪽으로 향하니 일렁이는 동중국해의 산호색 물빛이 아름답다. 바다의 윤슬이 일견에 들어오고 새하얀 백사장이 안구를 시원하게 정화해 주는 것 같다.


또한 저 멀리 심해의

코발트색 짙은 해류가 인상적이다.

가히 검은 해류라 칭할만하다.

따라서 현지말로는 쿠르시오해류 즉 흑조라 불린다. 해류의 흐름 또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빠르기란다.


이곳의 검푸른 조류의 일부가 우리의 남해로 흘러든다. 이처럼 짙은 바다색 때문에 대한해협을 현해탄이란 별칭으로도 불린다.


옛적부터 이 해류와 바람을 적절히 활용해 항해하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이곳 류큐왕국 즉 유구국 사람들이다.

그 옛날 조선왕가에 까지 조공을 보내온 기록이 있다. 뱃길로 장장 1천 킬로에 달하는 먼 거리를 오갔다.


바람과 해류에 의지하여 임진란 전까지는 해마다 우리에게 조공품을 가져왔단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친근한 곳이다.

또한 근현대사에서 제국 일본에 수난을 당했던 뼈아픈 동질성도 가진다. 이곳 유구인들의 역사에 측은지심이 생기는 이유다.


오키나와는 크고 작은 160여 개 섬들이 줄지어 있는 열도이다. 그 섬들의 배치가 마치 고깃 그물을 늘어놓은 형국이다.

따라서 옛적부터 우리를 비롯해 대륙에서 떠밀려온 표류민들이 심심찮게 이곳에 다다랐단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니 여기 해변에 서있는 감회가 새로워진다.


이곳을 먼저 거쳐 간 우리네 표착민들이 생각난다. 그중에서 구사일생으로 표착하여 저 해변을 유유히 걸어 나왔던 한 사람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의 극적인 표류기가 점점 내 머릿속을 채워오고 있다.


2백여 년 전 이곳에 표착한 흑산도 홍어장수의 얘기다.

흑산도와 영산포 뭍을 오가던 한 홍어장수 일행이 어느 날 커다란 풍랑을 만나 표류했다.


열흘이 훨씬 넘게 바람과 파도에 떠밀려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 후 기적적으로 다다른 곳이 바로 이곳 오키나와 유구국이다.

겨울철에 표류했다니 북동풍을 만났다면 충분히 이곳에 표착이 가능했다.


또한 유구국의 한 섬에 다다르게 된 건 그들에게는 행운이었다. 이곳에는 표착민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선량한 유구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에 돌아갈 날을 학수고대하며 현지에서 수개월을 머무른다. 그의 이름은 흑산도 사람, 홍어장수 문순득이다.


그는 끈질긴 생존력과 적응성을 보였다. 한편 그 와중에도 장사치로서의 수환을 발휘하고 낙천적인 기질로 현지의 풍물과 언어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렇게 그는 극한의 처지에서 현지에 적응하는 긍정적인 사고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이는 후일에 벌어질 일련의 사건들에 긍정적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문순득의 표류 얘기 전말에 앞서 오키나와를 둘러보자. 열도인 섬나라 소국이었던 옛 유구국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눈길을 끈다.

옛 왕궁이던 슈리성이 나하시내에 위치해 있다.


건축물의 형태는 다소 지근거리에 이웃한 규슈의

일본풍에 가깝지만 이질적인 독특함이 있다.

주변 인접국들의 옛 문화 영향일 것이다. 인접 대국들의 눈치를 끊임없이 살피며 국가의 존망을 걸었던 유구왕의 심경이 헤아려질 듯하다.


이곳에 표착했던 문순득은 지속적으로 고향에 돌아갈 길을 모색한다. 마침내 8개월 후 결국 이곳의 표류민 처우 관례대로 청나라에 보내진다. 청나라는 조선과 친숙한 나라였으므로 그와 일행은 흔쾌히 조공선에 몸을 싣는다.


그렇지만 설상가상으로 그 항해마저 순조롭지 않았다. 운명의 장난처럼 또 한 번 몇 날며칠을 풍랑에 떠밀려 표류하게 된다. 이번에도 구사일생으로 어떤 곳에 표착하기에 이른다. 그곳은 다름 아닌 여송국, 현재의 필리핀이다.


그렇게 문순득은 본의 아니게 풍랑 따라 동남아를 유랑하는 기구한 신세가 되었다.

2백 년 전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인들은 중국과 일본외에 다른 세상을 거의 모르던 시기였다.


그런 조선인 문순득에게 여송국에 표착은 색다른 신세계와의 대면이었다.

서구의 대항해 시대가 끝나갈 무렵 필리핀은 서구문명의 영향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후 그는 여송국에서 1년여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역시 갖은 곡절을 겪은 후에 이번에도 청나라 마카오행 교역선을 탄다. 그 후 고향을 향하는 집념은 계속되었다. 중국대륙을 1년 동안 종단하여 황도, 북경에 이른다.


그곳에서 조선의 사신단을 만났고 결국은 고향인 흑산도에

마침내 돌아온다. 흑산도를 떠난 지 삼 년을 훌쩍 넘긴 후에 온전한 몸으로 기적적으로 생환한 것이다.


이렇게 그의 유구국을 비롯한 일련의 동남아 표류기는 가히 극적인 상황의 연속이라 하겠다.


오랜 세월 동안 문순득외에도 많은 이가 유구국에 표류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표류들은 전해지는 기록이 전혀 없다. 어느 누가 어떠한 경로로 현지에 표착했고 그 후 정착해서 살았는지, 또는 고향으로 생환했는지 알 길이 만무하다.


일설에 '삼별초의 잔여세력이 유구국에 왕국을 세웠다'하고 홍길동의 율도국이 그곳이란 말이 있다. 하지만 전해지는 그 무엇이 없으니 안타깝게도 전설 같은 허구에 가깝다.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가.

물론 스토리의 비약일순 있으나 우리 역사기록의 빈약과 부재가 안타깝다. 하지만 이 모두가 일제만행의 결과라니,

당사국 영역인 오키나와까지 와서 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아마도 그들이 수십, 수백 건의 우리 역사서, 특히 그들의 콤플렉스인 고대사의 말살이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가 어땠을까.

분명히 편협한 반도 내의 식민사관은 사라졌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역사무대는 대륙 중원에 펼쳐 저 있고 허황후의 신라공주가 페르시아를 오가고 어쩌면 이곳 옛 류큐왕국이 삼별초의 왕국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역사가 양적, 질적으로 유연하고 풍요로워질 것은 분명하다.


한편 그들의 만행 이후 대륙과 타민족의 기록에서 또는 유물에서 역사적 사료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유감스럽게도 학계등의 뿌리내린 오염된 사관이 문제란다.


아무튼 기록물은 중요하다. 사료가 없는 전래 이야기들에 비하여

문순득의 오키나와를 비롯한 동남아 표류는 차원이 다르다. 그의 뛰어난 기억력과 관찰력 그리고 고향에 무사히 돌아온 생환력이 중요했음은 물론이다.

그에 더하여 행운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는 당대와 후세에 까지 알릴 수 있는 천만 대행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흑산도에 유배되어 온 실학자 정약전과의 만남이다. 그가 저간의 소문을 듣고 문순득을 잰 거름에 찾아온 것이다.


바깥 세계와 신문물을 갈구하던 실사구시파 실학자와의 조우이다. 그와 문순득의 만남은 천운이라 하겠다. 문순득은 상민출신으로 글을 몰랐지만 천부적인 기억력과 현지언어 습득력이 뛰어났다.


그런 홍어장수와 학식과 품격을 두루 겸비한 실학자와의 만남으로 의기투합이 된 것이다. 그렇게 하여 훌륭한 동남아 표류기가 탄생되었다.

이러한 기록 때문에 현세에까지 표류의 전말이 명료하게 전해진다.


옛 동남아 표류기를 접하면서 정약전과 문순득을 생각한다. 두 사람이 함께하여 매일밤 나누던 이야기보따리가 연상된다.


그들의 생생한 체험의 구술과 입담 그리고 묵필로 기록하는 열정의 장면이 그려진다. 또한 이를 취사선택 정리, 기록하는 총기 있는 실학자의 눈빛이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이렇게 오키나와에 와서 그가 직접 체험하고 당대의 실학자가 기록한 표해시말을 다시 소환해 보는 계기가 됐다.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다.


유구국의 자료에서 그 옛날 삼별초의 유의미한 흔적이 한편이라도 발견되었다면 어땠을까.

또는 홍길동의 얘기가 그곳의 문건이나 구전에서 한 구절이라도 채록된다면 어떨까. 아마도 오키나와 여행이 지금보다도 한층 더 의미 있고 유익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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