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삶의 소비 중계석 Dec 18. 2023

무망(無望)이 아닌 희망(希望) 있는 삶을 위해

Dream

어린아이들에게 묻곤 한다.

 ‘넌 꿈이 뭐야?’
 ‘하고 싶은 게 뭐야?’
 ‘뭘 좋아해?’
 
 나이에 따라, 성별에 따라, 성향에 따라 어릴 때부터 자신의 꿈이 명확한 아이도 있고 조금 늦게 자신의 길을 찾는 아이도 있다. 
 
 아이가 성장해 청년이 되면 또 묻는다.

 ‘앞으로 뭐 하면서 살거니?’
 ‘어떻게 벌어먹고 살 거야?’
 
 마냥 어린아이인 줄 알고 걱정 어린 질문을 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들 나름의 깊은 고민을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장년쯤 되면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자신조차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어떻게 살건지, 뭘 하면서 살건지, 뭘 좋아하는지, 하고 싶은 게 있는지,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지 말이다.
 삶에 쫓겨, 역할에 충실하며 책임의 끝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어릴 적 꿈, 좋아하던 것, 원했던 삶의 모습을 긴 시간 외면하고 자연스럽게 잊어간다.
 
 매일매일 똑같은 환경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어제와 판박이 같은 하루를 보내고 밤의 검은 이불을 덮고 눈감아 맞이하는 새까만 망각의 시간을 보내는 일상.
 시간을 소비하는 삶은 재미도, 희망도, 의미도 없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맞이하게 되는 질문 하나. 
 
 ‘왜 살지?’
 
 참 무서운 질문이다. 이 질문에 미처 인식하지 못한, 자신의 무의식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답을 하거나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찾지 못하면 살아있는 매일이 괴롭다.
 
 어린아이 든 노년이든 하고 싶은 뭔가가 있어야 한다. 막연하게라도 이루고 싶은 희망이 있어야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살 수 있다. 
 

외면하고 잊어가는 이유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 꿈을 외면하고 잊어가는 이유는 그 꿈을 가졌던 때의 나와 지금은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주어진 환경, 신체 나이, 경제적 여건 그리고 꿈을 이루는 데 걸리는 시간들이 꿈을 만났던 그때와 다르다.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곤 한다. 
 ‘부모 밑에 있을 때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봐.’
 
 책임의 크기가 작을 때 살고 싶은 삶을 향해 가기 위해 계획하고 실행해 보고 어떤 결과라도 얻어보라는 말이다. 
 
 꿈을 가지고 그것을 향해 나가는 삶을 살기 좋은 때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활기차고 건강하며 나만 책임지면 될 때이다. 이때가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가장 많을 때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범위가 넓어지고 책임의 크기가 커질수록 내 꿈을 향한 집중 시간은 줄어들거나 방향을 잃고 만다. 시간이 흘러 주변의 사람이 줄어들고 책임을 다하고 나면 연륜은 쌓이지만 그만큼 몸이 움직여주지 않아 꿈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데 시간이 더 든다. 또는 생존 경제가 뒷받침되지 않아 지나간 꿈을 회상할 여력이 되지 않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꿈을 향해 나아가는 노년도 많다. 아프지 않은 건강한 노년으로 살기 위해 건강 관리를 하고 책임에 쫓겨 미뤄둔 곱게 물든 희망을 이루기 위해 호기심을 채우며 의미 있는 일상을 채워가고 있기도 하다.
 
 희망은 크기 불문이다.
 그저 뭔가 해 보고 싶고,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바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삶의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삶의 동력의 크기는 내 아이와 대화하듯 아직도 철부지인 내 속의 나 자신과 이야기 나눠야 원하는 만큼 키워갈 수 있다. 스스로 묻고 대답하며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의 미래를 위해 조언해 주고 방향을 제시해 주고 실행하게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해줘야 한다. 
 
 지금은 조금 바쁘고, 버겁고 힘들겠지만 이렇게 준비해야 노화된 몸을 이끌고 살아야 하는 노년에 내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나'라는 보물지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