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삶의 소비 중계석 Dec 19. 2023

자기 합리화

나의 꽃밭.

SNS에 올라오는 내용을 보면 잘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 뿐이다. 아니 어쩌면 나와 비슷한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의 이야기는 외면하고 내 바람과 이상향을 보여주는 이들의 이야기만 눈여겨보는 걸지도 모르겠다.

손을 뻗으면 다을 것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보면 '나도 저렇게 해 봐야지.'라는 의욕을 가지 게도 한다. 하지만 바람뿐, 마음은 저만치 앞서가고 손끝은 꿈에 닿지 않으니 소망을 이루기가 어렵다.


수많은 SNS 채널과 책 중에 내가 관심을 가지는 카테고리는 자기 계발 분야다.


인플루언서들 중 몇몇은 자신처럼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SNS 속에서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가르쳐 줘도 안 할 거잖아요."

"알려드리는 대로만 하면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아니면 할 필요 없습니다."


꼭 그들처럼 되어야 하는 걸까?

물론 그들의 모습을 보고 부럽기도 하고 나도 저들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이 있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들이 행한 것을 따라 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100% 따라 하는 것은 어렵다. 아니 사실 따라 할 수가 없다. 나는 그가 아니고 그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이야기를 보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의지가 약해서 그래."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간절하면 다 하게 돼 있어. 네가 덜 간절한 거야."


그래, 나는 의지가 약했다. 그들만큼 해보지도 못했다. 나름은 간절하다고 생각하지만 타인이 보기엔 덜 간절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그게 나고, 내게 주어진 환경, 상황, 나의 성향에 맞춰서 나름의 노력을 한 건데.


자기 계발서들을 읽다 보면, SNS에서 타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들 '한 가지'에 집중해서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 한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 만들고 구체적으로 형태화 한 사람들이다. 무척 다양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뿌리줄기에서 필요에 의해 뻗어 확장된 것들이다.

 

'오랜 시간'

난 이 '오랜 시간'이라는 범위 안에 그들이 자신의 것을 만들기 이전의 시간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성인이 되기 이전의 가족 구성원의 영향, 거주 환경, 학력, 전공 분야, 사회생활 경력, 시대 환경 등 모든 것이 지금의 그들을 만들어 주는 자원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타의와 자의로 만들어진 바탕 위에 그들의 성향, 후천적인 노력, 실행의 시간이 더해져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으로 나는 그들과 같을 수 없고 그들은 나와 같이 될 수 없다. 

내가 그들과 같아질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다. 그들이 노력한 시간, 공부한 분야, 쌓은 경험을 그대로 투자하고 공부하며 그들의 경험이 아닌 내 경험을 쌓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공부해야 할 것이 산더미 같다는 것을, 내 성향과는 맞지 않는 수많은 도전과 모험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실패하고 좌절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어가야 한 다는 것을 말이다. 


모두들 꽃밭에서 향기로운 향을 풍기듯 좋은 이야기에 혹해서 그저 '해볼까?'로 시작하면 작은 씨앗에서 발아되어 뻗어 나가던 뿌리는 곳 헤집고 나가기 힘든 단단한 돌멩이를 만나고, 우회해서 뻗은 곳에는 더 큰 바위가, 다음엔 우회하기도 어려운 거대한 암석과 마주하게 된다. 


그의 밭이 아닌 내게 맞는 꽃밭을 만들어야 한다. 밭을 갈고, 돌멩이를 거둬내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잡초도 뽑고, 비료를 주고 해충이 들지 않게 가끔은 약도 쳐야 한다. 그렇게 갈고, 가꾸고 관리하며 내 밭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수고로운 노력을 해야 하고 지루한 시간을 버티는 기간이 지나야 꽃을 볼 수 있는 때를 만나고 꽃이 시들어 열매를 맺고 여러 개의 씨앗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나는 어쩌면 남의 꽃밭에서 내 밭을 만들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곤 내 꽃은 왜 안 피냐며 서운해했는지도 모른다. 다행이다. 남의 꽃밭에서 눈으로 구경한 것이라도 있어서.



작가의 이전글 무망(無望)이 아닌 희망(希望) 있는 삶을 위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