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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빼이 Mar 14. 2024

초빼이의 노포 일기[서울 중구 충무로 진고개 본점]

질어서 진고개, 변함없이 지긋해서 '진고개' 

충무로는 남산의 북쪽을 동서로 가르는 길로 넓게 보면 서울 중앙우체국에서 충무초등학교까지 이르는 길이다. 요즘의 주소로는 충무로 1가에서 5가까지이며 우리가 잘 아는 명동은 충무로 1~2가에 자리 잡고 있다. 


충무로는 일제 강점기 이전 대한제국 시절부터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엔 '경성부 본정(本町, 혼마치(ほんまち) 1 정목(丁目, 초메)~ 5 정목으로 지역명이 바뀌었다. 혼마치는 '근본이 되는 땅'이라는 의미로 일본인들의 조선 이주가 시작된 곳이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다 보니 인근 회현동의 남산 중턱에는 '조선신사'까지 세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우리나라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생인손(손가락에 난 아픈 상처)과 같은 지역과 같다. 해방 후 일본식 지명을 정리하며 일본인들의 기를 누른다는 의도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 지명으로 삼았다. (황금정이라 불리던 을지로는 중국인 집단 거주지역이었다. 당연히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땄다.) 충무로 이전의 이름은 진고개. 아주 오래전부터 충무로 일대는 '비가 오면 질어서 걸어 다니기 힘든 지역'이었다. 특히 충무로 2(명동)가 중국대사관 뒤편에서 세종호텔 뒤편에 이르는 길은 비가 오면 사람의 왕래가 끊어질 정도로 통행이 불편해 니현(이현())*이라 불리기까지 했다. '진고개'라는 말은 이 '니현(泥峴)'을 한자어로 표현한 것. 


지하철 3,4호선 충무로역 6번 출구를 나와 을지로 방향으로 쭉 걸어 내려가다 보면 시간의 흔적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타일로 덮인 건물을 마주치게 된다. 80년대식 네온사인으로 큼지막하게 '불고기, 냉면 전문 진고개'라 적힌 간판이 붙어 있는 건물. 이 건물을 보자마자 마치 7~80년대로 되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주변의 높다란 빌딩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이 나지막한 2층짜리 건물은 고즈넉이 내려앉은 지붕 위로 버텨온 시간만큼의 무게를 이고 있다. 오늘 찾은 집은 진고개(본점)다. 십몇 년 만에 찾게 되었다.     


'진고개' 역시 필동면옥과 마찬가지로 옛 광고회사의 사장님께서 처음 소개해 준 곳이다. 첫 방문은 회사 회식으로, 그 후로는 광고회사의 고객들과 식사나 친한 후배들과 술자리로 찾았었다. 이곳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기억나는 것이 '어색함'이었다. 


다른 가게들과 달리 진고개에서 홀서빙 담당은 언제나 연세가 조금 있는 여성분들이 해 주신다. 게다가 지금은 간편한 붉은색 티셔츠(유니폼)와 앞치마로 바뀌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개량 한복이 유니폼이었고 그 이전엔(첫 방문 때) 흰색 한복을 입은 아주머니들이 서빙해 주셨다. 그분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시골에 계신 친척 어르신들 생각이 나 주문하는 것이 꽤 부담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번 방문은 옛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직원과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자리였다. 몇 달 전 만남 때 초빼이의 소개로 찾았던 집에서 꽤 큰 실망을 해, 미안한 마음에 다시 약속을 잡은 곳이 '충무로 진고개'였다. 진고개는 한동안 발걸음을 하지 않았어도 희한하게 '변치 않았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이 점점 매섭게 날을 벼리고 덤비기에 약속시간보다 일찍 이 집의 문을 열었다. 입구에는 패딩 조끼를 입은 사장님이 십몇 년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손님을 맞으셨다. 그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옷매무새를 보자마자 예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재빨리 빨간 티셔츠를 입은 직원분이 다가오며 자리를 안내해 주셨다. "아직 일행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조금 있다 주문해도 될까요?"라고 물어보니 "편하게 기다리시라"라고 답하신다. 바로 옆 테이블의 단체 손님 테이블에서 끓어오르는 '어복쟁반' 냄새가 강하게 코 끝을 자극한다. 생각해 보니 초빼이 인생에서 첫 '어복쟁반'을 먹었던 곳도 바로 이 집이었다. 

어복쟁반 냄새를 참지 못하고 소주 한 병을 우선 주문했다. 소주 주문을 받으시는 직원분이 "날씨가 많이 추워요?"라고 물으신다. 의무감에서 나오지 않은, 손님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묻는 이런 질문들이 참 좋다. 단 한마디의 질문이지만 이런 질문 때문에 직원과 매장에 대한 신뢰가 솟아난다. 잠시 후 그 직원분께서 소주 한 병과 따뜻한 갈비탕 국물, 그리고 말린 호박을 불려 기름에 살짝 볶은 슴슴한 나물 한 접시를 내주셨다. "추워하시는 것 같아 국물을 데우느라 조금 늦었다"라고 해주시는 말씀에 몸과 마음이 스르륵 풀어진다. 십몇 년 만에 왔지만 여전히 '진고개'가 '진고개'했다. 


갈비탕 국물에 소주 한 잔. 말린 호박 한 젓가락에 소주 한 잔. 젓가락을 타고 올라오는 연한 호박 향이 참 좋다. 이미 소주 반 병을 비워 버렸다. 일행이 도착할 시간에 맞춰 미리 주문을 했다. 진고개가 처음일 옛 동료를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메뉴를 택했다. 마치 옛 광고회사의 사장님이 이 집을 처음 내게 알려주신 것처럼 옛 동료에게도 이 집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오래전 옛 직장의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자기만의 단골집을 '부사수'에게 소개해 주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일행에게 처음 소개해 줄 메뉴는 갈비찜 정식과 게장 정식. 오래전 이 집의 갈비찜을 맛보았을 때의 희열이 아직 초빼이에 가슴에 살아 있었고, 뻘건 고추장 게장의 그 매콤 달콤함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음식이 거의 나오니 일행이 도착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무 말 없이 소주병을 들었다. 갈비찜 그릇을 동료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진고개의 갈비찜은 굉장히 맛있는 갈비찜이다. 어중간하게 색깔만 흉내 내고 달기만 한 갈비찜이 아니라 한약재를 넣고 오래 끓여, 소갈비 살이 건드리기만 해도 국수 타래처럼 스르륵 풀어질 정도로 잘 삶은 갈비찜이다. 게다가 마치 쌍화차를 연상케 하는 한약재의 향이 간장 양념에 잘 섞여 굉장히 매력적이기도 하다. 십몇 년 전 이 집의 갈비찜을 처음 접했을 때가 기억났다. 초빼이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어너더 레벨'의 갈비찜이었다. 갈비찜이 이처럼 고급스럽고 맛있는 음식인지 이전엔 몰랐었다. 심지어 꽤 손맛이 좋은 초빼이의 어머니가 해 주시던 갈비찜도 이 집 갈비찜 맛은 따를 수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맛있는 갈비찜은 고기가 주연이 아니다. 고기의 육즙과 각종 채소들이 녹아있는 국물이 진정한 주인공이다. 갈비찜 그릇에서 국물을 떠 밥공기에 붓는다. 마치 상온에 내놓은 아이스크림처럼, 잘 만들어진 국물이 스르르 밥으로 스며든다. 그 위로 잔뜩 국물을 머금은 무 한 조각을 숟가락등(술등)으로 슬쩍 으깬다. 밥 알갱이 사이사이로 빈틈없이 녹아내린다. 한국의 밥상 씬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맛있는 한 술이다.. 진고개의 갈비찜 정식에서만 찾을 수 있는 맛이다. 앞자리에 앉은 일행의 숟가락은 이미 바빠졌다. 


게장 한 조각을 들어 그 친구의 접시에 놓았다. 깻잎은 아니니 마눌님의 쓸데없는 의심은 사지 않아도 될 터. 게장 한 조각을 들어 입에 넣으면 싱싱한 게살이 혀 위로 자리를 옮기며 스르륵 녹아내린다. '랍스터'니 '킹크랩'이니 하는 것들에서는 절대 느끼지 못하는 우리나라 꽃게가 가진 특유의 향과 맛이 있다. 냄새만 맡아도 '어? 꽃게네?'라고 알 수 있는 그런 향. 진한 게살향에 이어 잘 숙성된 고추장 양념의 향이 '훅' 치고 올라온다. 새콤달콤함의 모든 조건을 가진 음식이다. '고추장 게장'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이 집의 대표적 음식. 

여전하다. 달라진 것이 없다. 다행이다. 


함께 소주잔을 비우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다. 

"이 집은 와이프랑 부모님을 모시고 오고 싶은데요?"라는 동행의 말 한마디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생각해 보니 지난번 들렸던 집의 실패도 초빼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안절부절못하는 것인지. 변해버린 한 노포의 모습에 초빼이가 '대죄'를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 노포가 자신들의 '초심과 각오'를 계속 유지해 나가는 것은 참 지난한 일이다. 쌓는 것은 힘들어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요즘의 이 나라와 같다.  


오랜만에 찾은 '진고개'에서 비로소 안도감을 찾는다. 허기를 잠재우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음식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소주병이 비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초빼이의 테이블을 담당하는 직원분이 수시로 체크하며 빈 접시와 소주병을 채워주신다. 굳이 직원과 눈을 마주치고 부르지 않더라도 알아서 먼저 물어봐 주고 서비스해 준다. 음식에도 만족하고 직원분의 서비스에도 만족한다. 


'진고개'는 외국 관광객을 위한 음식점으로 시작하였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이런 출발점이 다른 노포들과는 급이 다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은 아닐까 추측한다. 수시로 테이블을 체크하는 직원분의 모습에서 맛있는 음식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과는 다른 또 다른 '무엇'을 얻어간다. 오랜만에 지갑 열고 '팁'을 드렸다. 이런 '팁'이라면 절대 아깝지 않다. 다음에는 오늘 함께 한 분과 오랜만에 '어복쟁반'을 먹어야 할 듯하다. 이렇게 노포 한 곳을 또 다른 이에게 소개한다. 


* 서울지명사전, 네이버지식백과, "이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08333&cid=43722&categoryId=43722 , 2024.03.11


* 안내 : 지난 3월 9일(토) 초빼이의 노포일기 출판을 앞두고 유명 유투버이자 팟캐스트 방송자인 '탁 PD'님의 라이브에 출연했습니다. '탁 PD의 여행수다'라는 방송이었는데 무려 두 시간을 넘게 대본도 없이 노포 이야기로만 라이브를 진행했습니다. 많이 버벅거렸지만 첫 방송이라 나름 의미 깊은 자리였습니다. 혹시 궁금하신 분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2부는 곧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탁 PD의 여행수다' - '초빼이' 김종현 작가의 음식유산의 보물창고 전국 노포 답사기(1)  

https://youtu.be/qGcqJ1KUjQ8?si=qll0MsOwz9eUnLyg

[메뉴추천]

1. 1인 방문 시 : 정식류 + 소주

1. 2인 방문 시 : 정식류 또는 단품메뉴(갈비찜 추천) + 소주.

2. 3인 이상 방문 시 : 어복쟁반 + 단품메뉴 + 소주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주차는 가게 앞 노상 주차공간에 가능. 단 노상 주차공간의 경쟁율이 치열하다. 게다가 곳곳에 주차단속 

    카메라가 있고 수시로 주차단속을 한다. 인근 민영 주차장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     

2. 월~토 11:00~21:30 / 매월 1,3,5번째 일요일 휴무 / 브레이크타임 15시~17시

3. 참고 

    - 퇴근 시간인 6시경부터는 웨이팅 할 수도 있다. 

    - 게장정식, 갈비찜 정식은 강추 메뉴. 오복쟁반도 좋다. 

    - 예약 및 문의 : 02-2267-0955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동원집, 사랑방칼국수, 필동면옥, 필동해물, 황평집, 평래옥, 충무로쭈꾸미불고기, 안동장, 

      을지오뎅, 산수갑산, 동경우동, 을지칼국수 

    - 한국 영화의 상징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영화 한 편은 어떠신지?

    - 조용한 산책을 원한다면 대한극장을 끼고 CJ인재원 쪽으로 쭉 올라가는 길을 추천. 남산 자락의 일부를 

      조용히 걸을 수 있다. 

    - 범위를 조금 넓히면 을지로나 청계천과 연계도 가능하다. 최근 세운상가 인근의 골목길이 야장을 즐길 

      수 있는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 옛 데이트의 명소 명동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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