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성동 만미정
요즘의 날씨는 도대체 중간이 없다.
9월까지 지속되던 열대야는 눈 한번 껌뻑이고 나니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리는 날씨로 바뀌어 버렸고, 이제는 낮 시간에도 얇은 외투를 걸쳐야 으스스한 추위를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지녀야 할 자세와 태도를 알려준다는 '중용(中庸)의 도'를 날씨에도 가르쳐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이기적인 행태가 만든 이상기온의 결과이겠지만 요즘 날씨는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은 오직 초빼이만의 감정일까?
한국인에게는 바람이 조금씩 날을 벼리기 시작할 때쯤 따끈한 국물을 자연스레 떠 올리게 만드는 독특한 유전자가 각인되어 있는 듯하다.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뚝배기 그릇에 밥 한 그릇 홀랑 말아 한 수저 가득 떠서 입안에 밀어 넣는 그 순간의 '맛과 느낌'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공통의 기억이 존재한다. 변수는 오직 뚝배기에 담긴 국물의 종류만 있다. 때로는 설렁탕이나 곰탕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순댓국이 될 때도 있다. 어느 날은 북엇국이 되었다가 때로는 칼칼한 육개장 국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초빼이는 이런 날씨에 가끔 떠 오르는 음식이 있다. 그 음식은 바로 돌우동.
보통 우리가 요리의 이름을 붙일 때 김치볶음밥과 같이 식재료와 조리법을 결합하거나, 평양냉면, 진주비빔밥과 같이 지역명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가끔 아주 특이하게 조리 도구나 그릇의 이름을 붙이는 음식이 있다. 투구를 뜻하는 전립(戰笠)에서 나온 전골, 뚝배기에 담는 해물 뚝배기나 뚝배기 불고기(뚝불) 등이 그렇다.
'돌우동'도 같은 결을 지닌다. 음식을 담는 그릇을 음식의 이름 앞에 붙였다. 80년대에서 2천 년대 초반 사이 한국식 우동과 김밥 그리고 라이스류(카레라이스, 오므라이스)를 내던 음식점들이 한동안 유행했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다전국수'나 가장 최근의 '용우동'까지 여러 업체들이 그 명맥을 이었던 것. 하지만 그 이전부터 한국식 우동과 모밀국수를 내던 지역의 강자들이 존재했었는데 최근까지 영업을 이어오고 있는 집은 이제 전국에 몇 집 남지 않았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경남 마산(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의 '만미정'이라는 곳이다.
돌그릇의 흔적을 우리 역사에서 찾자면 1세기 경의 유물에서 찾을 수 있다. 발견된 유물이 1세기 경의 것이지만 아마도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조선조까지 실생활에서 쓰였다.(1924년 쓰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밥 짓는 법'에 곱돌솥이 으뜸이라 나온다.) 돌그릇은 곱돌을 통째로 깎고 갈아서 만든 그릇이다. 그래서 석재의 특성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는데 가열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음식 전체에 균일한 열을 전달할 수 있어 타지 않는다. 또한 온도를 일정하게 오랫동안 유지하기 때문에 깊은 맛을 내며 쉽게 차가워지지 않기도 한다. 이런 특성을 잘 살린 것이 아마도 만미정의 돌우동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의 우동은 일본의 그것과 강조하는 부분이 다르다. 일본의 우동이 면이 가진 텍스쳐와 식감에 집중하는 '면요리'라면, 우리의 우동은 국물을 강조하는 '국물요리'다. 다양한 채소와 멸치, 가쓰오부시나 간장 등을 사용해 진하고 깊은 국물을 우려내 그 국물을 마시는 것이 더 중요했던 요리다.(해장용으로 많이 먹는다는 의미다.) 그런 목적에는 돌그릇의 장점이 극대화될 수 있었다. 그릇 전체가 균일하게 데워져 국물의 온기를 보존할 수 있었고, 가열되면 잘 식지 않는 돌의 특성으로 인해 오랫동안 국물의 온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여간해서 잘 쓰지 않는 용기인 '돌그릇'이 우리나라에서는 우동의 용기가 될 수 있었다. 뜨겁지만 시원한 국물을 찾는 이들에겐 이만한 용기(容器)가 없었다.
선선한 바람이 조금씩 느껴지던 어느 날 만미정의 문을 열었다. 점심 식사 시간을 조금 지난 때라 손님이나 직원들 모두 한숨 돌리며 있던 평온한 시간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돌우동과 김초밥을 주문했다. 돌우동과 김초밥은 마치 '회북에 옮겨 심은 탱자'와 같은 음식이다. 중국의 훈툰(餛飩)이 일본으로 넘어가 우동이 되었고, 다시 우리나라로 넘어와 '우동'이라는 이름은 남겼지만 성격이 다른 음식이 되었다. 일본의 마키즈시(巻き寿司)는 한국으로 넘어와 김초밥과 김밥이 되었다.
한치의 틈도 없이 끓어오르는 돌냄비 속의 우동 국물에서 진한 간장 향이 솟아오른다. 거품 하나하나가 하늘을 보며 터질 때마다 내뿜는 향에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폭발하듯 솟아오르는 거품 사이로 어묵과 버섯, 대추 한 알과 밤도 보인다. 마치 결혼식 피로연장의 갈비탕을 받는 듯 '대접받는 느낌'마저 든다. 한국의 우동은 한때 '가락국수'였던 적이 있었다. 굵은 면을 삶아 진한 육수를 붓고 쑥갓, 오뎅, 유부, 김가루 등의 고명을 얹었다. 한꺼번에 몰려들던 손님들을 그 짧은 시간에도 모두 만족시켰던, 옛 대전역 플랫폼의 가락국수는 아직도 초빼이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만미정의 우동은 조금 더 고급스럽게 표고버섯과 대추, 밤, 곤약, 가래떡 그리고 계란도 한 알 풀었다. 한 끼의 식사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다.
돌우동 그릇을 받으면 가급적 막 휘젓지 말아야 한다. 바글바글 끓는 거품 및에는 소중한 계란 한 알이 숨어 있어 자칫 막 휘젓다가 터뜨리면 돌우동 고유의 깊은 국물맛을 놓치기 일쑤이다. 계란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면 말미에 수란처럼 먹을 수 있다. 수저를 그릇의 가장자리에 수직으로 꽂아 한 김 식힌다. 그 후 국물 한두 수저 떠먹어보면 안다. 왜 이 집이 노포인지, 그리고 전국에 몇 남지 않은 돌우동의 명소인지. 절대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일본식 우동의 그것과는 다른 한국식 우동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멸치육수와 간장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그 특유의 맛은 이미 몇 십 년 동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날 때마다 가슴 설렌다. 간장으로 국물의 깊이를 더하고 멸치를 우려 그 폭을 넓혔다. 그래서 이 집 돌우동을 먹고 나면 항상 옷 속 깊숙이 우동 국물 내음이 내려앉아 있다.
돌우동의 면은 가급적 빨리 먹어치우는 것이 좋다. 돌 냄비의 특성상 오랫동안 열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한 눈을 팔아도 면은 쉽게 퍼진다. 물론 주방에서 낼 때 그런 시간까지 감안하며 우동면을 삶지만, 그런 배려에도 돌냄비의 우직함을 피할 순 없다. 초빼이의 경험상, 만미정의 돌우동은 면을 먹고 난 후 우동에 들어간 식재료 하나하나를 맛보는 것이 가장 추천하는 방법이다. 돌우동은 원래 그런 음식이다.
옆으로 잠깐 밀어두었던 김초밥을 몸 앞으로 당긴다. 접시 위의 김초밥에서 강렬한 식초향이 올라온다. 일반적인 우리의 김밥과 다른 결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김밥에도 단물(설탕, 식초와 물을 혼합)을 쓰지만 신맛보다 단맛이 더 강하다. 감미(甘味)의 역할이 더 강하다. 하지만 김초밥의 단물은 '초'의 향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이는 김초밥이 마키즈시를 기원으로 한다는 점을 명확히 짚어준다. 식초를 사용하여 멸균과 부패를 방지하는 근대 스시의 흔적이다. 한때 우리나라 음식업계에서는 일본 음식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을수록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치부했었다. 김초밥도 일식집에서 내던 메뉴 중 하나였다. 그 고급스럽던 음식을 만미정에서는 낸다.
외형은 조금 부실해 보이지만 속재료는 어지간한 김밥 전문점의 그것보다 훨씬 더 충실하다. 단맛 가득한 요즘 김밥집의 김밥이나 편의점 김밥에 비해 훨씬 더 건강하고 건전한 맛. 풀어지지 않게 젓가락으로 잘 붙들어 겨자장을 찍은 후 입으로 넣는다. 겨자와 간장 그리고 초단물의 케미스트리가 입안에서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마치 중성자와 충돌한 원자핵 알갱이가 쪼개지고 그 중성자 알갱이가 다른 원자핵 알갱이를 다시 쪼개는 것과 같은 '연쇄 핵분열'이 초빼이의 짧은 혀 위에서 일어난다. 엄청난 에너지가 입속 미뢰(味蕾)를 자극한다. 그 자극들은 머릿속으로 그대로 전달되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그리고 우동 국물 한 수저. 이 순서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비워버린 돌우동 그릇과 김초밥 접시를 마주하게 된다.
돌우동과 김초밥의 매력이 너무나 커 조금은 외면당하는 모양새지만, 이 집의 찬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맵고 짠 경상도 김치의 특성을 모두 망각한 듯, 만미정의 김치는 그 자체만으로는 그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그 크지 않은 존재감이 오히려 더 이 집의 음식을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만미정의 음식들의 특징이 강렬한 맛이나 향을 내는 음식이 아닌, 조금은 얌전하고 무덤덤한 음식들인바 그 음식들과의 합이 너무나 좋다. 특히 오이절임과 단무지는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수준급인데 모두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 서울의 이름난 음식점이나 일본에나 가야 맛볼 수 있던 수제 단무지를 마산의 작은 우동집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짙은 노란색 단무지가 아닌, 조금은 멀건 색의 단무지가 품은 그 맛은 절대 잊을 수 없다. 서울시청 별관 옆 노포 면집인 "유림면"의 수제 단무지 보다 더욱 맛있는 듯하다. 전체적인 음식의 밸런스가 굉장히 안정적이다.
단무지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모든 접시를 비운다. 40여 년을 이어온 노포 우동집에 대한 수줍은 '객'의 예의이다. 속이 부대끼거나 입안에 남는 텁텁함마저 없다. 깔끔한 한 상에 깔끔한 한 끼의 식사를 했다. 어느 인터뷰 기사에서 본 이 집의 1대 사장님은 더 이상 가게에서 뵙기 힘들다. 일주일에 하루만 출근을 한다. 이제는 이 집의 따님 부부가 대를 이어 가게를 꾸려 나간다. 하지만 음식의 맛에 대한 불평은 아직 찾을 순 없다.
가을이 오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무렵, 초빼이는 만미정의 돌우동에 김초밥 한 접시를 찾는다.
[메뉴추천]
1. 1인 방문 시 : 돌우동 + 김초밥
2. 2인 이상 방문 시 : 돌우동(또는 모밀국수) + 돌비빔밥 + 김초밥(또는 유부초밥)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별도의 주차 공간 없음. 인근 공영주차장 이용.
2. 매일 10:00~20:30 / 정기휴무 매월 1,3주 수요일
- 수제 단무지와 오이절임은 주의 깊게 먹어볼 것.
- 오래된 매장이나 정말 깨끗하다. 사장님의 성격을 볼 수 있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복희집, 6.25 떡볶이, 부림곰탕, 창동분식, 명동손국수, 멕시코, 피노키오, 사해원, 오코노미,
신라초밥, 불로식당, 화성갈비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