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교토 히가시야마구 마츠바(総本家にしんそば 松葉 本店)
홋카이도의 청어가 교토로 가는 길, 청어의 길(鰊街道, にしんロード)
교토(京都)는 1천 년간 일본의 수도로 자리 잡은 일본의 고도(古都)다.
정치의 중심지로 왕족과 귀족이 머물렀고, 종교의 중심으로 수백 개의 사찰이 자리 잡고 있는 승려들의 도시이기도 했다. 최소 10만에서 최대 40만 명(고대~에도시대)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했던 거대도시 교토는 일본 최대의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늘어난 인구만큼 심각한 걱정거리가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이들을 먹일 식량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영양소인 '양질의 단백질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텐무 천왕의 '육식 금지령'(소, 말, 개, 원숭이, 닭, 돼지 등의 사냥과 섭취 금지, 4월부터 9월까지 어업을 금지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함. 약 1,200년간 유지)으로 인해 안정적인 단백질원의 확보가 힘들었던 교토는 육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동물성 단백질을 대체할 자원이 필요했다. 그런 수요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것이 바로 '말린 생선'이었다. 교토는 내륙에 있는 도시였기에 생물 생선은 구하기도 힘들었고, 구할 수 있다 해도 수량이 제한된 '귀중품'으로 인식되었다. 왕족과 귀족 그리고 승려들은 당시만 해도 고급 음식이었던 '두부(콩 단백질)'를 통해 단백질을 섭취했고, 서민들은 생선을 말린 건어물이나 젓갈을 통해 단백질을 얻을 수 있었다.
서민들을 위한 생선들은 청어(鰊, にしん, 니신), 고등어(鯖, サバ, 사바), 정어리(鰯, イワシ, 이와시) 등이 주류를 이뤘다. 청어는 '미가키니신'으로 불리는 건어물 형태로, 고등어는 반쯤 삭힌 상태에서 젓갈의 형태로 교토로 운반되었고, 청어는 서민층에서, 상대적으로 값이 싼 정어리는 빈민층이나 노동계층에서 주로 소비했다. 교토의 인구가 워낙 많다 보니 이들의 수요는 엄청났다. 13~14세기 경에는 원산지에서 교토까지 이들의 수송을 위한 전문 해상 루트가 만들어졌는데, 이를 일컬어 '청어의 길(鰊街道, にしんロード)', '고등어의 길(鯖街道, サバロード)'라 불렀다.(아주 오래전엔 육로보다 해로가 더 빠른 길이었다.)
홋카이도는 일본에서도 청어가 많이 잡히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청어는 이른 봄, 우리의 동해를 따라 북상하며 홋카이도의 남서부(마쓰마에)에서 루모이, 소야(왓카나이) 방면으로 이동한다. 이때 홋카이도의 가장 북쪽의 왓카나이(稚内)에서 삿포로와 인접한 이시카리(石狩)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발하게 청어잡이가 이뤄지는데, 이 일대(국도 231호와 232호 라인)를 일컬어 '청어의 길'이라 한다(아래 첫 번째 지도의 파란색 부분). 청어의 길이 시작된 것은 에도시대 중기.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그리고 쇼와 초기까지 이어지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 지역에서는 청어를 잡자마자 건어물(마가키니신)이나 청어알(数の子, 카즈노코), 비료 등으로 가공하였다. 홋카이도의 청어잡이가 절정을 맞이한 것은 메이지 30년(1897년). 이 해에만 홋카이도에서 잡힌 청어가 100만 톤이 넘었다. 메이지 38년(1905년)에는 청어로 올린 수익이 811만 엔으로 홋카이도의 같은 해 석탄 판매량(약 700만 엔) 보다 많았다고 한다.(출처_홋카이도 개발국)
가공된 청어는 홋카이도의 남부로 옮겨져 '기타마에후네(北前船)'라 불리는 수송선을 통해 운반되었다. 홋카이도 남부에서 출발한 '기타마에후네'는 혼슈를 거쳐 호쿠리쿠 지방(동해에 면한 교토의 북쪽 지방으로 가나자와, 도야마, 후쿠이 등이 있음)에 머물며 오사카와 교토에 청어를 공급했고, 곤부(다시마)를 싣고 오키나와까지 남항하기도 했으며 일부는 중국(淸)까지 수출되기도 했다. 청어와 다시마의 유통을 통해 일본 내륙과 혼슈로 이어지는 '식문화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되었고,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는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해산물 식재료의 공급망을 구축하며 소규모의 '해상 실크로드'를 완성했다.
또한 오사카와 교토의 정월음식(おせち料理, 오세치 요리)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인 '카즈노코(数の子)'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카즈노코란 '청어의 알을 소금에 절인 것'으로서 청어는 '鰊'라고 한자로 적지만 '니신(二親, にしん)'이라고도 표현하며, '두 부모로부터 많은 자식'이 나온다는 의미로 자손번영을 기원하며 먹었던 음식이다.
청어를 말렸지만 조금씩 다르다. 과메기와 미가키니신(みかきにしん, 말린 청어)
일본에 '미가키니신'이 있다면 한국엔 과메기가 있다. 두 음식(식재료) 모두 청어라는 같은 재료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만드는 과정과 최종 완성품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초겨울(11월)부터 잡기 시작하여 1~2월까지 청어를 잡지만 일본은 우리와 청어를 잡는 시기가 달랐다. 홋카이도에서는 청어를 '꽃 소식을 전하는 물고기*'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이는 일본의 청어 산지가 워낙 북쪽인 홋카이도 인근(위도에 의한 기온차)이었고 청어의 산란지가 홋카이도 인근이라 생길 수밖에 없는 차이이기도 하다. (*[사카나와 일본]_서영찬_동아시아_2024.09.04. 인용)
'미가키니신(みかきにしん)'은 청어의 머리와 내장, 큰 뼈를 제거해 살만 남겨서 말린 청어를 뜻한다. 냉장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청어살의 기름으로 인해 상하지 않게 보존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청어를 일본의 각지로 유통시키기 위해 가공한 것이 바로 '미가키니신'이었다. 손질한 청어를 완전히 말려 딱딱한 상태로 만든 후 이를 유통시켰다. 1717년에 쓰인 일본 문헌 '송전양이기(松前蝦夷記)'에는 청어의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말린 것이나 청어의 알을 말렸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미 이 시기에 청어의 건조 방법이 널리 알려졌다는 의미. 일반적으로 머리와 내장을 제거한 후 여러 번 씻어 기름기와 냄새를 걷어내고 1차 건조에 들어간다. 그 후 굵은 뼈를 발라내며 얇게 저며낸 후 2차 건조(1주일)를 통해 완전히 말린다. 그 후 1개월이 넘는 숙성과 건조 기간을 거치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미가키니신'은 완전 건조를 통해 장기간 상하지 않게 하여, 먼 거리를 이동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과메기는 일본의 그것과 달랐다.
우리의 '과메기'는 겨울을 상징하는 음식이자 식재료였고, 오랜 보관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눈을 꿰어 말린 고기'라는 의미의 '관목어(貫目魚)'에서 유래했다는 과메기는 원래 청어가 주재료였다. 예전엔 내장까지 통째로 말려 만들었으나 요즘은 내장을 빼고 반으로 갈라 해풍에 말린다. 소비 계층의 취향 변화에 식재료 손질법의 변화가 뒤따랐다. 손질한 청어를 바닷물에 수차례 씻어 염분기를 입힌 후, 3~15일 정도를 말리는데 겉면은 바짝 마르고 속살은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한다. 이때의 수분 함유량이 약 15% 정도. 이처럼 과메기는 장기 보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유(魚油)에 의한 부패를 지연시키고, 감칠맛을 올려 겨울철 한 철 동안 소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가깝지만 먼, 두 나라의 차이는 말린 청어에서도 이렇게 차이가 있다.
홋카이도(北海道)의 청어, 교토(京都)의 '향토음식'이 되다.
교토는 내륙에 위치한 도시로 생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었던 곳이었다.
냉장이나 냉동기술이 없던 시대, 교토의 주민들이 생선을 소비할 수 있는 방법은 말리거나, 절이거나, 발효시킨 것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기술의 발전이 사람들의 식생활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었다. 장기간의 보존과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 식생활의 형태보다 더 중요한 시절이었다.
물론 신선한 생선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 교토의 '니시키 시장(錦市場)'은 1615년(에도 초기)에 생선 도매상(魚問屋)이 이미 운영되고 있었다. 땅 밑의 지하수(15~18°C)를 끌어올려 생선의 보관에 활용했다고 한다. 추측건대 지리적으로 가까운 오사카나 고베 그리고 인근 비와호에서 잡은 생선들이 일부 교토로 흘러 들어왔을게다. 하지만 이런 날생선은 극도로 제한된 상류층만 소비가 가능했을 뿐 일반 서민들의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교토의 서민들이 생선회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쇼와 중반(20세기 후반) 이후 냉장과 냉동 기술의 발전과 전국적 냉장 유통망이 갖춰진 후에나 가능했다.
교토에서 청어가 향토음식이 된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교토에는 신선한 생선을 접할 수 없었고, 교토로 운송된 청어는 잘 말려 오래 보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도시기부터 메이지 시기 홋카이도의 '미가키니신'이 대량으로 교토로 유입되며 '미가키니신'을 사용한 요리가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다. 교토에서 난 식자재와 제철 재료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교토의 전통 가정식 '오반자이(お番菜, おばんざい)'에 청어를 사용한 요리가 포함되며 그 위상은 더욱 단단해졌다.(니신나스(청어가지), 니신콘부마키(청어다시마말이) 등)
말린 해산물과 두부와 곤약 등과 같은 가공 식재료 그리고 교토의 제철 채소(京野菜, 교야사이)로 만들어 낸 조합은 감각을 자극하는 '강력한 맛이나 향'을 가진 요리보다는 '섬세하고 디테일'이 살아있는 정교한 요리로 교토의 요리를 발전시켰다. 이와 함께 귀족들의 연회 음식에서 발전한 '교요리(京料理)'나 선종 사찰에서 구도의 일환으로 만들었던 '쇼진요리(精進料理, 정진요리)'의 전통도 가정식 요리에 큰 영향을 주며 청어가 교토의 향토요리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데 일조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82년 교토의 한 소바집에서 '미가키니신'을 양념에 졸여 부드럽게 만든 후 소바의 고명으로 올린 '니신소바(にしんそば)를 출시했다. '니신소바'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교토의 소바를 대표하는 소바가 되었고, "청어는 북해도의 생선이지만 동시에 교토의 맛"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내기까지 했다.
한 그릇의 니신소바는 초기 청어 어업을 시작했던 홋카이도 원주민 '아이누족'의 피와 땀, 홋카이도의 어부들과 청어의 길을 오가던 선원들, 수송선의 정착지가 되었던 일본 서부의 포구 사람들. 오바마(小浜), 와카사만)로부터 시작하는 내륙의 수송로를 걸었던 짐꾼들, 그리고 교토의 가정식, 궁중요리 그리고 사찰요리의 전통을 이은 요리사들의 노력이 켜켜이 쌓여 완성된 것이다. 단순히 소바 위에 양념에 졸인 청어 한 마리 놓았을 뿐이지만 그 작은 소바 한 그릇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부은 염원이 들어있다. 그래서 니신소바는 단순한 한 그릇의 소바가 아니었다.
니신소바의 원조 마츠바 본점(総本家 にしんそば 松葉 本店)
마츠바 본점은 교토의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아사카 진자(八坂神社)의 인근에 있다. 1년 365일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교토에서도 가장 관광객이 많은 곳 중의 하나가 기온 지역인데, 마츠바는 기온과도 이웃하고 있다. 기온시조역(祇園四条駅) 6번 출구로 나오면 사거리 코너에 자리 잡은 빌딩 전체를 사용하는 큰 규모의 매장이 바로 마츠바의 근거지다. 1861년 창업하여 올해(2025년 기준)로 164년의 세월을 견뎌온 곳이다. 초대 대표인 '마츠노 요에몬(松野与衛門)'이 분큐 원년(1861년) 가부키 극장 '미나미자(南座)' 맞은편에 '찻집 마츠바(松葉)'를 열며 마츠바의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 후, 2대인 '마츠노 요사키치' 사장이 니신소바를 개발하며 교토를 대표하는 '니신소바 원조집'이 되었다. 오늘날의 마츠바는 2대 사장 '마츠노 요사키치(松野与三吉)'가 만들어 낸 역작이다.
일본의 지역 음식을 나타내는 말 중 '간사이(關西)는 우동(うどん), 간토(關東)는 소바(そ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간사이 지역의 우동 사랑은 남달랐다. 교토 역시 소바보다는 우동이 더 인기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교토에 있던 수백 개의 사찰에서 '행사음식'으로 소바를 내며 간사이 지역의 다른 곳들에 비해 소바에 대한 거부감은 적었던 편이다. 이때 교토에는 소바집들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찻집이었던 마츠바도 이런 기류에 편승하였다. 마츠바의 2대 사장은 소바와 청어를 같이 먹는 교토의 식문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고명으로 청어를 올리는 과감한 시도를 통해 교토의 소바에 혁신을 일으킨다. 혁신은 익숙한 일상에 일어나는 작은 변화에서부터 시작한다.
청어를 소바의 고명으로 올리기 위해서는 '딱딱하게 건조한 청어(미가키니신(みかきにしん))'를 소바면의 식감에 방해되지 않도록 부드럽게 만들어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마츠바에서는 쌀뜨물에 청어를 담가 산패한 지방을 걷어내고, 양념에 사케를 사용하여 청어 특유의 비린내를 잡았다고 한다. 양념장의 간장과 미림은 삼투압 작용을 일으키며 단단한 청어의 살 속으로 단맛과 짠맛이 스며들게 했다. 거기에 부드러운 식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불에 졸인 후 식혀, 소바 위에 올렸다. '니신소바'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니신소바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맛의 탄생은, 청어와 소바의 육수가 만나면서 일어난다. 소바의 육수는 다시마와 가쓰오부시 등을 넣고 끓인 후 간장으로 색과 간을 맞추는데 이 육수가 맛있게 졸인 청어와 만나면서 일으키는 맛의 변화는 그야말로 핵폭탄급. 다시마 감칠맛의 주성분인 '글루탐산'이 청어와 같은 생선이 품고 있는 '이노신산'과 결합하면 본래의 감칠맛(우마미)보다 7~8배 정도까지 증폭된다고 한다. 감칠맛을 내는 두 종류의 아미노산이 자그마한 소바 그릇에서 만나 일으키는 맛의 변화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였다. 이과의 영역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맛의 변화가 작은 소바 그릇 안에서 일어났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일본인들은 청어를 젓가락으로 조각내어 국물에 푹 담근 후 즐기는 법을 선호한다.
솔직히 말하면 초빼이는 마츠바의 니신소바에서 7~8배 상승하는 '우마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초빼이가 이 집을 찾은 날은 올해 5월 초였는데 이 날은 일본 전역이 이상기온으로 무척이나 더웠던 날이었다. 심지어 홋카이도 지역의 낮기온이 30도를 기록할 정도로 더웠던 날이라 도저히 온소바를 주문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계절 한정'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히야시니신소바(冷しにしんそば, 냉청어소바)'의 이름이 메뉴판에서 가장 먼저 보였기에, 따뜻한 국물에 제대로 우러난 감칠맛을 느끼지 못했다. 거기에 '히야시니신소바'는 차가운 국물이라 감칠맛 성분이 느리게 녹아든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청어를 조각내어 토핑으로 올렸기에 본연의 맛도, 청어 한 마리를 고명으로 올린 시각적 즐거움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야시 니신소바의 맛은 너무나 훌륭했다.
소바면은 깊은 산속에 있는 사찰에서 들려오는 독경 소리처럼 고요하고 청명했고, 소바 육수는 바다를 품은 듯 진하고 깊이가 있었다. 거기에 잘 졸여진 청어는 입 안에 남은 소바 육수와 어우러지며 가볍지 않으며 자연스러운 단맛을 뿜어냈다. 감칠맛이기도 했고 감미(甘味)이기도 했다. 청어의 식감도 무척 인상 깊었는데 우리나라의 '코다리 조림'보다 2~30% 정도 더 단단한 식감이 너무나 안정적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 단단한 식감이 청어 속살의 결마다 감칠맛을 꽉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사실 초빼이에게 이 집의 니신소바는 인생 첫 니신소바였다. 한국과 일본에서 다양한 소바를 경험했지만 왠지 니신소바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니신소바를 제대로 만드는, 역사 깊은 집에서 니신소바의 첫 경험을 하고자 열망했다. 이 집이 내 욕구를 만족시켰다. 워낙 기본이 탄탄하고, '니신소바'라는 장르 자체를 만들어 낸 집이라 안심할 수 있기도 했다. 이 집에서 느낀 니신소바의 맛은 앞으로 맛볼, 미래의 니신소바에 대한 확실한 기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음식을 접하고 배워 나간다.
164년이라는 오랜 역사처럼 진하고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곳,
니신소바의 원조 마츠바 본점(総本家 にしんそば 松葉 本店)이다.
[추가 팁]
1. 매장명 : 니신소바 마츠바 혼텐(総本家 にしんそば 松葉 本店)
2. 주소 : Kyoto, Higashiyama Ward, 四条大橋東入ル川端町192
3. 영업시간 : 목~화 10:30~20:30 / 정기휴무 수요일
4. 주차장 : 별도의 주차장은 없다.
5. 참고
- 예산 : 1인당 1,000~2,000엔.
- 연락처 : +81-75-561-1451
6. 이용 시 팁
- 현금, 카드 결제.
- 니신소바는 필수. 니신나스테에쇼쿠(にしん茄子定食)도 추천.
- 연세 있는 종업원들이 무척 친절하다. 일본어 메뉴판이 어려울 경우 영어 메뉴판도 제공
https://maps.app.goo.gl/74WLii5VQV1kLw6V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