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인생, 무료인생

by 여르믄




한별이네는 겨울방학이 되면 2주 정도 베트남에 다녀오곤 한다.

베트남은 한별이엄마에겐 친정이고, 아이들에겐 외가인 셈이다.

올해도 설연휴를 낀 2주간으로 일정을 잡고 1월초에 항공권을 예약했다.

여행이 확정되자 집안 분위기는 한껏 들떴다.

크고작은 캐리어들이 거실로 다 나왔고 옷, 신발, 선물, 각종 용품들이 캐리어 주변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베트남 간다고 연일 자랑이다.

게다가 힘든 일도, 짜증도, 심부름도, 걱정도, 하기 싫은 공부도 가뿐히 해내고 처리한다.

맨날 투닥거리던 삼남매 사이도 좋아졌다.

일상의 모든 일들이 베트남 여행을 향하여 관대하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2주간의 베트남 여행이 한별이에게 마냥 좋기만 할까.

지난해 일이 떠올라 살짝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 한별이는 ‘스팸밥’과 ‘네’라는 몇 가지 단어만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

한별이네 가족은 주로 베트남어로 대화를 한다.

네 식구중 한별이만 베트남어를 하지 못했고 나머지 식구는 카톡 대화나 유튜브 시청도 베트남어로 했다.

그래서 한별이가 더욱 우리말을 배우지 못한 것 같았다.

일년 전 한별이가 베트남 여행을 갈 즈음에는 나와 석달 정도 지낸 뒤였는데 막 말문이 트이려는 상태였다,

주변에 별 관심이 없던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자기 의사를 밝히기도 해서 식구들과 함께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하루하루 나아지는 게 보이던 참이었다.

그런데 베트남에 2주간 갔다오더니 다시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간 게 아닌가.

평소에도 스팸밥과 컵라면 외에 다른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는 한별이가 베트남에서라고 다를까, 컵라면만 주구장창 먹었다더니 바짝 야윈 모습에다 행동은 더욱 산만해졌고 말은 한국어도 베트남어도 아닌 정체불명의 언어로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얼마 동안 여독을 빼느라 신경써야 했다.

물론 아이의 인생 전반에서 보면 베트남 외가에서의 추억은 그런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의미있다고 믿는다.


여행 날짜가 정해진 뒤 한별의 형과 누나는 부업에 열심이다.

한별이네 집에는 현관에서부터 거실 입구까지 이삿짐 박스가 항상 쌓여있다.

언젠가 이 물건들이 뭐냐고 묻자 한별이 엄마는

“회사에서 일 가져와요. 아이들 돈 많이 들어요. 돈 많이 벌어야 해요.”

라고 말했다.

주사기 모양의 의료기를 조립하는 일인데 부업은 한별이 엄마와 누나, 형이 하고 있다.

섬세한 작업이어서 작업대로 쓰이는 식탁에는 자가 붙어 있고 조립을 돕는 묵중한 기계와 밝은 스탠드, 그리고 작업하면서 영상을 볼 수 있게 휴대폰 거치대가 설치돼 있는 둥 언제든지 의자에 앉기만 하면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돼있다.

엄마는 퇴근후에, 아이들은 하교후에 부업을 도왔다.

방학중에는 아이들이 낮에도 일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형 한주는 방과후수업을 듣고 합기도학원에 가야 하지만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터라 거의 집에서 일을 하고 있다.

누나는 모델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한 이력도 있고 모델일을 준비중이다.

남매가 부업을 해가면서 집안일은 물론 자기 일까지 똑부러지게 해낸다.


어쨌거나 베트남에 다녀오려면 일단 돈이 많이 든다는 걸 남매는 너무나 잘 안다.

누나와 형이 스탠드 조명 아래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한별이는 티브이 앞에서 열심히 놀고 있다.

한주가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갈 리 없다.

“저는 유료인생이에요. 누나도 유료인생이고요. 쟤만 무료인생이에요. 저는 공짜로 밥 안 먹어요. 집에서 이 일 해서 번 돈으로 먹고 사는 거예요.”

말하는 그 표정이 사뭇 진지한데 나는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러자 한주는 놀고 먹는 동생과 일하는 자기 상황의 불공평함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먹고 쓰는 것은 일해서 얻은 대가이며 하늘 우러러 한치도 공짜로 살아본 적은 없다는 것을 눈을 동그랗게 떠가며 강조했다.

“...... 저는 당당해요. 저는 공짜 아니에요.”

한별이는 부업도 하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고 비싼 스팸만 먹고 티브이를 보며 놀기만 한다.

그럼에도 가족의 사랑을 무한대로 받는다.

한주는 그런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별이네는 대외적인 행사는 물론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즐기는 가족이다.

엄마는 요리대회에 나가서 대상을 받는가하면 누나는 모델대회에 나가 입상했고 형은 이중언어말하기대회 입상하는 등 기회만 있으면 참여해서 상을 타온다.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하는 모임이나 행사, 프로그램은 물론 합기도나 기타 학원에서 연중행사로 하는 합숙캠프에도 항상 참여하는가 하면 행사가 없는 주말휴일은 늘 여행을 가거나 캠핑, 수영장, 키즈카페 등 여가를 활발하게 보내는 편이다.

캠핑을 못 가는 겨울에는 거실에 커다란 텐트를 치고 램프를 켜서 지내곤 했다.

얼마 전 어느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장항준 감독이 '인생을 여름방학처럼 즐기며 사는 것이 가훈이다.'라고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는데 한별이네도 재미있게 살기 위해 돈을 버는 집 같다.

그런 모든 행위들의 결정적인 동기에 한별이가 있다.

가족을 유익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살아가게 만든다.

그러니 모든 인생은 다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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