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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아 태어나줘서 고마워> 컷팅 종이 사이로 파란 염료가 스며든다. 기계에 수건을 다시 깔고 누른다. 민혜의 손에는 파란, 검정 글자들의 흔적이 늘어난다.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이 번져서 다른 말이 되지는 않았는지, 글자를 눈으로 다시 찍어낸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태어나줘서 고마워, 태어나줘서 고마워.
오래된 기계는 가끔 이상한 말을 뱉어낸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할 때마다 억지로 끌어올려지는 입꼬리처럼 버벅거린다. 그런 인사치레가 나이를 먹으면 쉬워질 거라 믿었지만 기계를 보니 더 이상한 말만 뱉어낼 게 뻔하다.
행복수건입니다. 민혜의 물든 손이 온몸을 떠는 핸드폰을 깨운다.
자수가 많이 팔리긴 하는데... 빨리 받아보시려면 나염이 좋아요.
펜을 찾던 민혜의 손이 멈춘다. 벽에 걸려있는 시계가 오늘 하루의 4분의 1을 잡아먹고 있었다.
조문객용이요? 저희 업체가 작아서... 당일 제작은 어려워요.
선물용이라 패키징 들어가는 건데 손이 많이 들어서요.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당장 지금부터 작업을 하더래도 패키징까지 마치면 새벽이 달려온다. 그때는 수건을 가져갈 사람도 더 이상 장례식장에 오지 않는다. '격려와 위로 감사합니다.'를 밤새 새겨 배달 가는 일은 새벽에게 쫓긴 위로를 건네는 기분이다. 새로 생긴 회사, 새로 생긴 가정,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건네는 축하와는 무게가 다르다. 위로로 닦아지지 않는 얼룩이 있다. 온몸을 수건으로 감싸도 멈추지 않는 울음이 있다.
컷팅종이가 찢어져 글자가 번져간다.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이 일그러진다. 한 번 형태를 잃은 말은 본 뜻을 잊는다. 새로운 컷팅 종이를 꺼내려다 민혜는 민혜의 이름이 뚫린 잔뜩 일그러진 축하를 본다. <한민혜 여사 팔순잔치를 축하합니다> 민혜의 이름은 자신의 뜻을 잃고 번진 채로 굳어있다.
10
비싼 인조 잔디에 온몸을 붙인다. 세연의 발끝부터 주황색 저녁이 차오른다. 이제 뛰는 방법을 모두 잊어도 된다. 혹시 적어둔 게 있다면 버려도 된다. 출발선에서 출발하지 않아도 되고 걷는 방법만 공부하면 된다. 가득 채워진 박스 위까지 저녁이 떨어진다. 근데 어떻게 걸었더라.
고개를 돌리면 박스를 끌고 오는 수희가 보인다. 수희의 뒤로는 오후가 도망치며 빛을 내고 있다. 수희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세연의 머리 위로 박스가 씌워진다. 수희의 표정이 궁금했는데. 세연의 옆에 누운 수희는 차가워진 세연의 몸을 껴안는다. 세연의 갈비뼈쯤에 수희의 머리칼이 느껴진다. 밤이 오나 보다.
11
이빨이 많은 계단을 뛰어내려 간다. 파란 철문 앞에 서면 아침보다 더 썩은 냄새가 올라온다. 문틈 사이로는 보라색 꽃이 보인다. 하나, 공, 육. 이 집이 맞다. 박스 위에 써둔 글씨는 번져 이상한 말을 뱉는다. 우유는 모든 걸 쏟아내고 비릿한 향만 남았다. 민혜는 민혜의 집 문을 두드린다. 한 마디 뱉을 때마다 상한 우유 냄새가 폐까지 차오른다.
여사님 계세요? 한민혜 여사님! 철문이 흔들리며 굉음을 만든다. 답이 없는 집 옆으로 사람이 하나 지나간다. 옆집으로 들어가려던 사람을 불러세운다.
저기요! 여기 할머니 언제부터 안 보였어요?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냐고요.
옆집 사람에게 던져진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옆집 문이 잠궈진다. 민혜의 집에도, 민혜에게도 그 어떤 온기도 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