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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본 May 14. 2022

나는 독자에게 분개했다



저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에세이 혹은 시를 쓰고 있습니다. 대학교에서도 국문학을 전공 중이고, 진지하게 작가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20대 청년입니다. 누구도 궁금할 것 같지 않은 저의 이력을 작성한 이유는 글에 관해 진심이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고 본 이야기에 들어가고 싶어서입니다. 지금까지 올린 글들이 삶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것들이었다면, 이번 주제는 어느 한 댓글에서 촉발된 개인적인 작품 감상에 관한 견해입니다. 


  얼마 전 일이었습니다. 제가 본 것이 책이었는지 영화였는지 혹은 그림이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품 밑에 달린 댓글은 가히 저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에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댓글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이 작품은 너무 좋긴 한데,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다. 과거에는 독자가 작품을 감상한 이후 작품에 관하여 해석하고 작가의 의도를 도출했다. 하지만 요즘 시대는 작가 스스로가 작품 안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표현하여 독자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이처럼 어려운 작품은 시대에 도태된 작품이다.'


  저는 이 댓글을 보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머리까지 올라오는 끓어오름을 느꼈습니다. 진실로 댓글 작성가 말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파헤치고, 손쉽게 만들어서 독자들에게 떠먹여 줘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댓글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끓어오름을 느끼긴 했지만, 과연 작성자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생각 가지는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로 뻗쳤습니다. 근래 몇 년간 발표되었던 책이나 영화 혹은 웹툰과 같은 매체의 작가, 감독들에 대한 댓글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정확한 수치로써 말해드리기에는 개인적인 체감이지만, 체감상으로는 확실히 과거보다 현재의 독자층들은 해석하는 것에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작품들이 쉬워졌고, 작가가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부분들이 많아지는 방향성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댓글 작성자의 말이 옳다고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방향성이 옳은가?'에 대한 답변은 매몰차게 '아니다.'라고 확정 지었습니다. 저의 의견이 확립된 이후 '왜 방향성이 옳지 않은가?'에 대한 이유를 하나씩 생각해보기 시작했습니다.


  독자가 작가에게 모든 감상의 해석을 맡기는 것은 작가의 노력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미국 저술가 재닛 버로웨이는 저서 <Writing Fiction>에서 '작가는 한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 소설 전체의 맥락과 등장인물의 성격, 사건의 배경 등 수도 없이 많은 요소들을 생각하고 그에 상응하는 단어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의미를 담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데 독자가 작품을 보며 작가에게 왜 이런 단어가 쓰였고, 왜 이런 배경이며 등장인물은 왜 이런 행위를 하는지에 관하여 하나하나 설명해주길 바란다면, 작가의 노고는 이미 무시했을뿐더러 작품에 녹아 있는 수많은 매력들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설령 댓글 작성자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에 대해서 작가가 설명해준다고 가정해봅시다. 저는 더 이상 그 작품은 작품이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소설의 문단마다 각주를 달고 폰트와 서체를 달리하여 설명글을 적어 놓는다면, 책을 그대로 덮고 쓰레기통에 넣을 것입니다. 그것은 작품이 아닙니다. 교과서 혹은 참고서일 뿐입니다.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려고 금액을 지불하고 시간을 할애합니다. 우린 작품을 감상하려고 왔습니다. 강의나 수업을 듣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지점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감상은 수업이나 강의의 개념이 아닙니다. 감상에는 작가의 의도 파악만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작품을 감상하며 느낀 자신의 생각, 감정, 의견 등 자 신또 한 들어가 있는 개념입니다.


  작품은 감상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유아기에 머물러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타인의 생각을 곧이곧대로 자신의 사고로 입력시키는 시기는 지났다는 겁니다. 작품을 감상하고 음미한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를 스스로 파헤치는 과정, 파헤치는 과정 속에서 도출된 결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키워나가는 행위 등이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결코 떠먹여 주는 것을 받아먹는 것이 감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작품의 요소를 작가가 해설하고 해독해주길 바란다면, 다시 고등학교로 돌아가 국어 선생님의 작품 해설을 듣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우린 서점과 영화관으로 강의를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다시 돌아와 방향성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독자가 작품 감상을 거부하는 방향성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이는 것이 아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에세이를 통해서 "모든 작품의 해설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때에 따라 너무나도 어렵고 난해한 작품은 추가적인 설명과 해설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작품에 대한 감상은 시작조차 안 하고 그 출발선에 서서 마냥 아기새처럼 목구멍을 벌리고 있는 태도는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감상은 정답이 없습니다.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열 개의 감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출발선에서는 벗어나 조금이라도 걸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걷다가 힘들면 쉬면 되는 것이고, 도저히 못 걸을 것 같으면 포기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결승점을 통과했을 때는 월등히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상 작가를 꿈꾸는 20대 청년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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