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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본 May 28. 2022

나는 아직 말을 하지 못합니다

 


찬 공기가 아직 남아있던 봄이 완전히 지나가고, 완벽한 초여름 햇살이 비추던 날이었다. 오늘따라 할 일이 없어 침대 위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던 터였다. 같이 있던 이들도 이 고요한 적막을 깨뜨리기 싫었는지 각자 자세는 제각각이지만, 모두 소리 없이 쉬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이 덜컹 열리던 순간이. 이마팍에선 송골송골 땀이 맺힌 모습과 한껏 상기된 표정을 지은채 우리에게 찾아왔다. 고요한 적막을 깨뜨렸기 때문일까, 갑작스러운 등장 때문이었을까. 우린 모두 몰래 사탕을 먹다 걸린 어린아이 같은 눈동자를 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야, ○○아. 빨리 가서 전화받아."


 ○은 도대체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한 사람임을 티 내고 싶은지 머뭇거리는 몸짓으로 방을 나섰다. 사람이란 원래 호기심의 동물이 아니던가. 방 안에 있던 우리들도 ○과 마찬가지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와 함께 방을 나선 지 1분쯤 되었을까, 우리는 몰래 방을 빠져나왔다. 살금살금 로비까지 발걸음을 옮기니, 로비 밖으로 ○○가 전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다른 곳을 밟으면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처럼 한 자리에서 꼿꼿하게 서있는 모습이 꽤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다 함께 방으로 속히 돌아갔다. 전화를 받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30분쯤 지났을까, ○○는 방으로 터벅터벅 들어왔다. 나는 그가 침대 위로 주저앉을 때까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얼마나 힘없게 문을 열었길래 소리조차 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실제로 밀랍 인형을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마치 잘 만들어진 밀랍 인형 같았다. 오지랖이 발동해 이대로 가만히 그를 둘 수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갔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더욱 밀랍 인형 같았다. 피부는 창백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으며, 눈은 인형 눈을 붙여놓은 것 같았다. 무슨 소식을 받았길래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지 내심 추측하고 예상하고 있었다. 한순간 이런 내 모습에 소름이 끼쳐 배덕감이 몰려왔다. 


 배덕감을 뒤로한 채 실질적인 문제가 나에게 주어졌다.


 '주어진 상황에서 올바른 행동을 하시오.'


 그렇게 이 못돼 먹은 현실은 나에게 어려운 문제만 던져주고 가버렸다. 그렇지만 일단 문제가 주어졌으니 오답을 도출해 내더라도 빈칸에 답을 적어 제출해야 한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을 잘하는 성질 덕분에 이미 표정이나 몸짓은 한껏 움츠리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마치 갓 태어난 태아를 다루듯이 말이다. 하지만 말과 행동이 나를 가로막았다. 당최 공식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은 순간적으로 백지화되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며 옆에는 이의 얼굴색은 흙빛으로 변 가고 있어 손발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무슨 문장을 내뱉어야 할까, 어떤 손짓과 발짓을 취해야 할까. 고민과 고민을 거듭해 나갔다. 하지만 결국 빈칸을 채우진 못했다.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상투적인 말과 행동을 취하였으므로 빈칸을 적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상컨대 그도 내가 그저 예의 차림으로 곁에 다가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감정과 생각은 온전히 그를 위하고 있는데 이것이 충분히 그리고 확실히 전해지질 않았으니 나 또한 서러웠다. 어른의 말법. 어른의 말법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어린 사람의 말법과 달리 성숙하고 진지한, 그러면서 효과적인 어른의 말법이 간절히 내 손안에 있길 바랬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한 법이지 나에겐 기적이란 일어나지 않았다. 배우거나 익히지 못했기에 나는 사용하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투적인 예의 차림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했다. 도대체 어른의 말법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길래 나는 여태 배우거나 익히지 못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지속되는 생각 속에 몇 가지 문장들을 나열했다. 어른의 말법이란 상황이 발생함에 있어 우왕좌왕하지 않고 침묵하며 차분히 무게를 지키는 것, 통상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말을 건네는 것, 책에 나올법한 고상하고 현학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문장을 만드는 것, 욕설이 단 한 단어도 섞이지 않은 청렴한 문장을 만드는 것, 낭만과 비유가 가득한 문장을 사용하는 것, 송의 포증과 같이 참과 거짓을 명백히 가려내는 것, 오직 진실만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 수많은 문장들이 나열되었지만 그중에 어느 것이 어른의 말법인지 정립되지 않았다. 


 지금보다 좀 더 시간이 지나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면 배울 수 있는지, 아니면 그저 나이 갸 들어감에 따라 저절로 익혀지는 것인지 고민스러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만난 어른들을 생각하면, 그저 나이가 들었다고 익혀지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더 많은 책과 교육적인 영상 혹은 배울만한 어른들을 만나면 배울 수 있을까 하고 상상을 이어갔다. 그렇게 생각의 생각을 이어나가는 도중 한 가지 정론이 세워졌다.

 

 한 가지 정론이란, 내가 타인에게 말을 하거나 혹은 말을 하지 않고 행동만을 취할지라도 그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그저 그와 타인이라는 현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감정에 동요될 수도 있고, 위로하고 싶을 수도 있다. 또한 그의 생각에 감탄할 수도, 탄복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와 타인이기에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내가 섣불리 통제하거나 강제로 변모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충분히 슬픔을 맞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저 겉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론이 행성과 그 행성 주위를 도는 위성 같다는 생각을 했다. 행성은 위성보다 그 크기가 커 그에 맞춰 중력을 이용해 영향을 주지만 위성은 행성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그리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시 고갤 돌려 ○○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었다. 그의 표정과 몸짓에 여전히 나 또한 가슴이 아팠지만, 더 이상의 오지랖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그는 그의 세계를 지킬 의무와 권리가 있다. 내가 좀 더 어른의 말법을 배운 그날에는 가장 최고의 방법으로 위로하리라 속으로 되뇌었다. 아직 하늘은 쨍쨍했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그렇게 그날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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